마더 (Mother, 2009)

감독 : 봉준호
출연 : 김혜자, 원빈, 진구, 윤제문, 전미선, 문희라

<마더>를 본 뒤에 <마더>와 <터미네이터 4>의 첫날 흥행 성적에 대한 기사를 되새겨보면서 가장 의아했던 것은 기사 중반에 나온 한 관객의 평이었다. '연기, 스토리, 화면, 음악 모두 좋았습니다. 묵직한 감동까지' 솔직히 이해하기 힘들다. 영화가 나빴다는 얘기가 아니다. <마더>의 연기, 스토리, 화면, 음악이 모두 좋았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감동'이라는 말. 사람의 감성에는 개인차가 있으므로 내가 무엇에 대해서 감동을 받지 못했더라도 어떤 사람은 거기에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감상이란 온전히 개인의 몫이라서 (나를 포함해서) 누군가 거기에 왈가왈부할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작품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는 사실. <마더>는 살인죄를 뒤집어 쓴 아들을 구하기 위한 어머니의 사투, 즉 보편적인 모성애에 호소하는 영화로 포장되었다. 그러나 다 보고 나서 드는 생각은, <마더>는 모성애의 승리나 그 위대함을 찬미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리해서 다시 말하자면 내가 궁금한 것은 그 관객은 영화의 어디에 감동을 받았을까 하는 것.

영화의 줄거리는 다들 알고 있는 바, 잘 생겼지만 지능이 조금 모자란 청년 도준(원빈)이 동네에서 일어난 여고생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다는 것이다. 취조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방어하지 못한다. '물방개 한 마리도 못 죽이는' 도준이 범인이 아니라고 믿는 엄마는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 그러나 알고 지내던 동네 형사 제문은 엄마와 도준을 도울 마음은 있으되 이미 결판이 난 사건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고(종팔의 옷에서 발견된 혈흔이 문아정의 것임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제문이 도준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 아닐까), 변호사는 도준의 정신이상 판정을 받아내서 형량이나 좀 깎으려 한다(도준이 정신이상으로 살인했다는 낙인이 찍힌다면 엄마 역시 그 동네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엄마는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범인을 찾아내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도준이 사건이 벌어진 날 밤 목격한 것들을 기억해내게끔 애를 쓰는데, 아들은 엉뚱하게도 다섯 살 때 엄마가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일을 생각해낸다. 도준에게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엄마는 긴 비명을 내지르는데, 이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부분이기도 하며,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어떤 전환점이 된다(침을 맞자는 엄마에게 침을 놔서 죽이려고 하느냐는 도준의 모습은 유명한 옛날 괴담을 떠올리게 한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살인의 추억>과의 연관성.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는 결정적인 순간에 아버지가 어린 시절 자신을 아궁이에 던졌음을 털어놓는다. <살인의 추억>과 마찬가지로 <마더>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죽이려 하는데, <살인의 추억>에서는 백광호의 아버지가 그런 짓을 했던 이유가 밝혀지지 않았다. <마더>를 바탕으로 추론하면 <살인의 추억>에서도 백광호의 아버지가 모자란 자식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고 살아가지 않도록 죽이려 들었다는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한 감독이 나중에 만든 영화가 앞서 만든 영화를 이해하는 바탕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 재미있는데, 중요한 것은 <살인의 추억>과 <괴물>, <마더>에서 봉준호 감독이 보여주는 가족에 대한 관점일 것이다.


(<괴물>에서 가족의 상상 속의 식사장면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은,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정을 보여주는 장면)

<마더>는 지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 <살인의 추억>의 한 부분을 떼어다 다른 각도에서 영화화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문아정의 시신 밑으로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무심하면서도 기괴한 상황, 형사가 죽은 문아정의 감은 눈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은 <살인의 추억>의 풍경이기도 하다). <살인의 추억>은 아무래도 가족 영화라고 할 수는 없는 작품이었는데, <살인의 추억>에서 백광호 부자의 관계가 <마더>의 도준 모자의 관계로 이어지고 <마더>에서는 그게 영화의 중심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살인의 추억>, <괴물>, <마더>에 등장하는 백광호 가족, 강두 가족, 윤도준 가족은 모두 어머니나 아버지 둘 중에서 어느 한 쪽이 없다는 것이다. 앞선 영화들을 다시 봐야 세밀한 부분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이 영화들에서는 어떤 까닭에서든 부모 중에서 한 쪽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다. 결손을 메우기 위해서라도 가족들은 서로에게 더욱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괴물>은 그런 가족이 합심해서 가족을 되찾기 위해 분투한다는 점에서 좀 더 보편적인 가족 영화로 봐도 괜찮을 것 같은데, 봉준호 감독은 갑자기 <마더>를 통해 <살인의 추억>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마더>는 <괴물>과 유사하게 어머니가 가족을 (괴물이 아니라 감옥으로부터) 되찾으려고 애쓰는 영화지만 결말과 주제는 전혀 다르다.

소위 말하는 <마더>의 반전은 엄마가 무죄라고 여겼던 아들이 사실은 진범이라는 것, 엉뚱한 사람이 범인으로 잡히면서 도준이 감옥에서 풀려난다는 것이다. 영화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어머니가 그 진상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간다. 만약에 영화가 거기서 멈췄다면 어머니가 춤을 추는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대구를 이뤘을 테지만(그것만으로도 재미있고, 완결성이 있을 것 같긴 하다) 감독이 하고 싶은 얘기,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뒤에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엄마는 자신에게서 돈이나 뜯어내는 야비한 진태 앞에서, 세상에서 도준이가 제일 만만하니까 (죄를) 도준이한테 덮어씌운다고 울음을 터뜨린다. 엄마에게 있어 자신의 아들(더불어 그녀 자신도)은 가장 약하고 만만한 존재, 세상에서 죄를 덮어씌우는 희생양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고 범인으로 몰린 기도원 종팔이를 만난 엄마의 인식이 변한다. 기도원 종팔이에게는 엄마도 없었다. 그는 엄마의 가족보다 더 약하고 만만한 존재이며(아마 고물상 영감도 화재로 인해 죽었을 거라고 여기고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고물상 영감 역시 엄마보다 더 약한 자의 범주에 들어간다) 엄마가 아들을 빼내기 위해서는 그를 희생시켜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세상으로부터 결백한 희생양이 아니라 더러운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는데, 이때 종팔이가 간단하게 '울지 마라'고 말하는 대목은 아마 이 영화가 정말 감동적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 근거가 되는 단 한 부분 아닐까? 이때 종팔이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묵묵히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성자처럼 보인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모성애에 대한 감동보다는, 관객들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그런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설령 감독의 의도는 아니더라도 관객들이 통렬하게 받아들여야 되는 작품 아닐지.

<마더>의 반전은 다른 영화에 비해 유달리 극적인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이를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 같다. 그러나 이 깨달음으로 엄마는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지옥을 만나게 된다. 엄마는 살인자인 아들과 함께 살게 된다. 엄마는 살인자인 아들과 평생 같은 잠자리에 들면서 잠을 이루지 못한 채 그를 뜬눈으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는 것은 <CSI 과학수사대> 이후에 촉발된 과학 수사에 대한 대중적인 흥미인데, 살인사건 수사에 대한 경험이 거의 없는 형사들도 요즘은 형사들이 CSI 같은 것을 많이 봐서 현장 보존을 잘 해 놨다고 으스대며, 진태의 방에도 과학 수사에 관한 책이 있다(진태가 엄마에게 형사들이 수사를 잘못 하고 있다면서 앞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조언을 한 것은 엄마에 대한 안타까움도 약간은 있겠지만, 대부분은 엄마를 이용해서 자신의 쓰레기 같은 호기심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인 이득도 노릴 수 있으리라고 계산했기 때문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나중에 이뤄지는 도준의 독백은 과학수사, 프로파일링, 연쇄살인이라는 소재와 근사하게 어울리지 않는가. 도준의 독백은 살인자의 병적인 심리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가 또 다른 살인을 저지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적인 욕망이 있고 여자에게 치근대는 것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도준, 자신의 행동을 기억할 줄 모르는 도준. 그런데 도준이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를 때 그 대상은 엄마가 될지도 모르고(잘 잊어버리는 도준이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엄마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하여튼 그가 이후에도 누군가를 죽이긴 죽일 것 처럼 보인다. 만약 도준이 자신이 저지른 행위를 기억하게 된다면 그는 어떤 방향으로 폭주하게 될까?
<살인의 추억>과 <마더>에서 보이는 봉준호 영화의 가족은 그 안에 치명적인 상처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이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오게 될 지는 아직 그의 영화에서 밝혀지지 않았다(아마 다음 영화가 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다루는 시대가 1980년대에서 2000년대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봉준호가 보여주는 한국 사회의 풍경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벤츠 몰고 다니면서 골프나 치러 다니는, 사람을 쳤을 때도 별 일 없다는 듯 엑셀 밟고 앞으로 나가는 교수들, 가난한 소녀에게 쌀을 받고 몸을 사면서 걸레라고 비웃는 소년-남자들(문아정의 핸드폰을 찾던 2인조는 핸드폰에 담겨 있는 사진을 이용해서 돈이나 좀 뜯어내보려는 속셈이었을지도), 피의자의 입에 사과를 물리고 발차기를 해서 겁을 주는 형사, 룸싸롱에서 술을 마시면서 적당히 형량을 거래하는 변호사와 판사. <지리멸렬> 이후부터 내가 본 봉준호 영화에서 한국 사회에 대한 풍자가 사라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엄마는 허벅지에 침을 놓는데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때문에 맺힌 가슴 속의 울화를 푸는 행위인 동시에 엄마가 그 일을 덮어버리고 살아가기로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엄마가 자기 몸에 침을 놓는 것으로 끝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이치에 맞는 결말이다. 지옥에 들어서서도 그놈의 모정은 아들을 차마 뿌리칠 수 없다.

1. 진태와 재수생의 베드씬 장면에서 그들은 섹스를 하면서 음식 이름을 내뱉고 있다. 사정을 지연시키려는 행동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네가 이런 음식들처럼 맛있다'는 뜻일지도.

2. 장례식장에서 담배 피우던 문아정의 친척이 엄마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때리는 장면은, 배우가 아니면 그런 연기를 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뭔가 이어지는 장면이 더 있었을 것 같은데 거기서 편집한 것 같아 아쉽다.

3. 영화에서 가장 우스운 장면은 엄마가 도준에게 어렸을 때 xxxx(농약 이름이었는데 무엇인지는 기억이 안 난다)을 먹였으면 죽었을 텐데 마음이 약해서 xxxx을 먹였더니 죽지도 못하고 토하기만 하더라고 능청스럽게 털어놓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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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령옥

영화 리뷰 2009/05/24 15:30



완령옥 (阮玲玉, Center Stage)

감독 : 관금붕
출연 : 장만옥, 양가휘, 진한, 유가령, 이자웅

<완령옥>은 상해에서 활동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전설적인 여배우 완령옥의 삶을 재현하는 동시에, 현재의 배우들이 완령옥의 삶에 대해서 토론하고 이해하며 그녀의 전기 영화를 찍는 과정을 담아낸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카탈로그에는 <완령옥>을 영화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고 말하지만, <완령옥>은 영화보다는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는 작품에 더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는 유가령과 장만옥 등에게 완령옥이 오늘날에도 기억되는 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길 바라는가를 질문하는데(유가령은 당연히 그러길 바란다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이것은 배우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인 것 같고, 완령옥이 촬영을 끝내고도 촬영 당시의 감정에 사로잡혀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오랫동안 우는 장면에서 나타나는 배우라는 존재의 숙명과 고통, 완령옥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집요한 옐로우 저널리즘의 공격 등은 오늘날의 배우들도 겪는 일인 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그의 고통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이다. 영화는 완령옥(장만옥)이 <신여성> 촬영 당시 병원 침대에서 죽어가는 장면을 찍은 뒤에도 오랫동안 흐느끼는 모습을 잡아낸다.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그것은 영화 속 영화임이 드러나고, 그 순간 이불보를 뒤집어쓰고 흐느끼는 것은 완령옥이 아닌 장만옥이다. 그러니 영화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배우에 대한 영화로 보일 수밖에.

다큐멘터리와 결합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영화를 주로 이끌어가는 것은 장만옥이 연기하는 완령옥의 삶의 재현인데, 영화에서 재현하는 완령옥의 삶의 축은 그녀가 출연한 영화들과 그녀의 애정 관계다. 완령옥은 유복한 집안 출신인 장달민과 연인 사이였으나 나약한 정신을 가진 장달민은 경제적으로 몰락해가고 있었으며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완령옥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을 피해 잠시 홍콩으로 피신했던 완령옥은 부유한 사업가이자 자상한 당계산에게 이끌리고 그와 동거를 하게 된다. 그러나 당계산에게는 아내와 정부가 있었고(그 정부 역시 유명 배우 출신이었다), 당계산은 완령옥과 동거하면서도 아내와 헤어지지 못했다. 완령옥은 당계산의 사람됨을 나중에야 알았으나(물론 당계산에게 아내가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다) 그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고 영화는 서술하고 있다.
당계산과 완령옥의 관계는, <연지구>를 떠올리게 하는 데가 있다. 당계산은 나중에 대만에서 생활했고, 몰락하여 거리에서 담배를 팔다가 늙어 죽었다고 영화는 밝히고 있다. 완령옥이 음독하기 전의 나레이션을 보면, 그녀는 만약 영혼이 있다면 당신을 보살펴 주겠노라고 말한다. 그 얘기를 들으니 <연지구>에서 이승에 남긴 연인을 찾아 온 기녀의 유령, 그리고 결국 몰락하여 초라해진, 그녀의 늙은 연인의 뒷모습이 자꾸 떠오르는 것이다. 장달민은 매달 10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완령옥과 헤어졌는데 결국 그의 변심이 완령옥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장달민의 변심에는 국민당의 공작이 개입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정확한 진상은 알 수 없고... 장달민은 완령옥 전기 영화에 자기 자신의 역할로 출연하기도 하는 등, 죽은 후에도 그녀와의 추억을 뜯어먹고 살았으니 영화에 출연한 누군가의 표현대로 구제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폐병으로 일찍 죽었다는 건 영화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알았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그녀와 미묘한 관계에 놓이는 사람은 양가휘가 연기한 채초생 감독이다. 영화를 보면 적어도 채초생은 완령옥을 좋아했던 것처럼 보인다. 채초생은 장달민 같은 속물도 아니었고 당계산 같이 겉으로만 자상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했던 것은 용기. 스캔들에 휘말린 완령옥이 자기를 데리고 홍콩으로 갈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채초생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한다. 채초생은 완령옥을 구할 수 없었다.

완령옥은 16세에 데뷔하여 연화 영화사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예쁘게만 보이면 그만인 '꽃병' 역할에 머물렀다고 영화는 전한다. 장만옥이 영화에서 완령옥에 대해 얘기하면서, 옷깃이 목을 안 보이게 하는 옷을 입고도 섹시함이 뿜어져나오더라고 감탄을 하는 것이다. 그녀가 채초생 앞에서 마를렌느 디트리히 흉내를 내자 채초생은 마를렌느 디트리히는 촌부 역할은 할 수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 하지만 당신은 할 수 있다. <삼개마등여성>이라는 영화에 출연할 때, 이 소박한 배역은 당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감독 앞에서 그녀는 평범한 옷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배역에 잘 어울린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연기에 임했고, 그만큼 내면에는 고통이 쌓였던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그녀와 어린 소옥의 관계도 이해하기 쉽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면 그렇게 정리가 된다. 아이를 낳은 적이 없던 그녀는 소옥을 입양함으로써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게 많은 영화에서 어머니 역을 맡았던 그녀의 연기의 원동력이 된 게 아니었을까. 물론 그러한 행동이 연기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말하기가 쉽지 않지만, 적어도 그녀의 열정과 자세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연화 영화사는 애국적인 기운이 넘치던 곳이었는데,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연화 영화사 인물들의 관계 등은 처음에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중에 완령옥이 죽기 전날밤 벌어진 파티에서 어떤 감독에게 한 얘기를 들어보면(손유 감독이었던 것 같다), 이 영화사가 그녀에게 정치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영화는 1991년 현재 폐허가 된 연화 영화사 부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연화 영화사에 대한 정치적인 공격이 그녀를 표적으로 삼아 이루어지게 된다. 발단은 채초생이 찍은 <신여성>의 옐로우 저널리즘 비판을 기자들이 자신들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인 것이고, 영화는 당시 기자협회 내부의 국민당 당원들이 영화에 대한 보이콧 분위기를 일으켰다고 말한다. 채초생은 기자협회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기자들에 대해 비판한 장면들을 삭제했는데, 이 시점에서 완령옥의 스캔들이 기사화된다. 사업을 한다면서 돈을 당겨 받았고 변호사 앞에서 합의문에 서명까지 한 장달민이 갑자기 완령옥과 당계산을 고소한 것은 누군가의 조종에 의한 것 아니었을까 추측된다는 것은 앞서 얘기한 바와 같다.

처음에는 약간 따라가기 힘들었던 영화를 갑자기 넋놓고 보게 했던 것은 완령옥과 여리리(유가령)가 <소완의>를 촬영하는 장면이었다. 여리리가 자신의 어머니 역을 맡은 완령옥 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장면을 찍을 때, 비목 감독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데 그게 뭔지 꼭 집어서 얘기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때 완령옥이 여리리에게 그녀가 연기하는 인물의 캐릭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리고 나서야 그녀의 연기는 감독을 만족하게 한다. 이때 영화는 실제 <소완의>의 프린트를 보여준다. 그 장면에서 여리리의 눈물이 완령옥의 손가락에 맺히는데, 그것이 꼭 진주처럼 보인다. 관금붕이 찍은 <완령옥>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있는 완령옥 실제 출연작들의 프린트도 아름답기 그지없는데, 특히 앞서 상영한 <신녀> 때문에 <완령옥>을 더 특별하게 볼 수 있었다. <완령옥>에는 완령옥과 더불어 <신녀>에서 그녀를 착취하는 두목 역을 맡았던 장지직이 서로 연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경찰에 쫓겨서 장지직의 방에 들어간 완령옥이 그의 손아귀에 걸려드는 장면이었다. 그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은 완령옥은 책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는데, 그것은 소극적인 반항의 몸짓이었다. 영화에서는 그 장면을 장만옥이 그대로 연기하는 것과 더불어 <신녀>에서 그 장면의 프린트를 보여준다. <신녀> 덕분에 <완령옥>을 더 특별하게 보았고, <완령옥> 덕분에 <신녀>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완령옥은 독백을 통해 자신은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세상의 소문은 두렵다고 말하고 약을 먹는데, 완령옥의 장례식 장면 역시 앞서 나왔던 <신여성>의 클라이막스 촬영 장면처럼 그것이 영화 속 영화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장면은 몹시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장만옥은 죽은 완령옥이 되어 누워서, 컷 소리가 날 때까지 숨도 쉬지 않고 있다. 그 장면의 촬영에 참가한 배우들도 이것이 마치 실제 상황인 것처럼 엄숙하고 진지하게 연기하고 있다. 그러한 모습은, 이 장면이 실제 상황이 아니라 연기라는 소격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완령옥의 운명을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진짜 운명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촬영을 통해 그녀를 추모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장만옥은 비록 완령옥처럼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진 않았지만 이 영화에서 완령옥과 장만옥은 서로 겹쳐 보인다. 지금으로부터 18년전, 한창 아름다운 20대 중후반의 장만옥과 인생의 절정기에서 세상을 떠난 완령옥 두 사람의 아름다움이 겹쳐지고, 배우라는 존재의 운명, 연기에 대한 열정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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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비리아

영화 리뷰 2009/05/23 12:53


카비리아 (Cabiria, 1914)

감독 : 조반니 파스트로네
출연 : 움베르토 모자토, 바르톨로메오 파가노, 이탈리아 알미란테 만지니, 리디아 카란타

무려 식민지 조선에서도 상영했다는 1914년대 무성영화다. 원작은 유명한 이탈리아의 애국 시인인 다눈치오. 3부로 나뉘어져 있고 시대 배경은 2차 포에니 전쟁기다. 유복한 집안의 다섯 살짜리 어린 딸 카비리아(불꽃과 같은 영민함이라는 뜻)는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는 가운데 유모인 크로에사와 함께 집을 빠져나왔다가 해적들에게 사로잡힌다. 카르타고로 팔려간 그녀는 몰록신에게 제물로 바칠 어린 아이를 사러 나왔던 대제사장 카르탈로의 눈에 띄어 잡혀간다. 카르탈로에게 대들었다가 매를 맞은 크로에타는 마침 카르타고를 염탐하러 왔던 풀비우스와 그의 노예 마키스테를 만나 카비리아를 구해달라고 요청한다. 풀비우스와 마키스테는 용감하게 카비리아를 구해낸 뒤 쫓기다가 카르타고의 왕 하스드루발의 딸 소포니스바와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가 밀회를 나누는 정원에 도착한다. 두 로마인은 급한 나머지 소포니스바에게 카비리아를 맡기고 풀비우스는 탈출하지만 마키스테는 사로잡혀 맷돌을 끄는 형벌을 받게 된다.
세월이 지난 뒤 풀비우스는 해군을 이끌고 시칠리아를 치다가 빛을 모아 배를 불태우는 아르키메데스의 전략에 패하고 만다. 난파를 당한 그는 해변에 떠내려오고,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데려간 곳은 카비리아네 집안이었다. 카비리아의 부모는 죽은 줄 알았던 그녀가 살아있다는 것을 알고 풀비우스에게 다시 카르타고로 가거든 그녀를 꼭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한편 카르타고의 정세는, 마시니사가 키르타의 왕 시팍스에게 패하자 하스드루발은 그녀의 딸을 시팍스에게 다시 맡기고 로마를 치려고 하는 상황이었다. 마시니사는 로마의 스키피오와 함께 복수를 하고, 시팍스는 마시니사에게 사로잡힌다. 풀비우스는 마키스테를 구해내고, 도망치다 탈진한 풀비우스는 마키스테와 함께 패주하는 키르타 군대에게 사로잡힌다. 그들은 감옥에서 자신들에게 물을 가져다 주는 소포니스바의 몸종 엘리사를 만난다. 한편 소포니스바는 마시니사를 설득해서 로마에 대항하게 만들려 하고, 이를 걱정하는 스키피오는 소포니스바를 전리품으로 요구한다. 소포니스바는 자신이 몰록신의 입 안에서 죽어가는 불길한 꿈을 꾼 뒤에 대제사장에게 해몽을 부탁한다. 대제사장은 잃어버린 제물을 찾아야 된다고 이야기하고, 이에 소포니스바는 엘리사를 대제사장에게 넘긴다. 엘리사는 바로 카비리아였던 것이다. 대제사장은 엘리사를 탐하려 하지만 풀비우스와 마키스테가 그녀의 위기를 알고 쳐들어오고, 다시 쳐들어온 병사들에 맞서 그들은 창고로 숨어 대치한다. 시팍스 왕이 사로잡힌 걸 본 키르타는 로마군에 항복하고, 소포니스바는 풀비우스와 마키스테에게 엘리사가 죽었다고 말한다.
마시니사는 사랑하는 여인과 로마의 압력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소포니스바에게 자결하라고 독약을 보낸다. 소포니스바는 약을 먹고 죽어가면서 엘리사를 사면한다. 엘리사는 풀비우스의 연인이 되어 그들과 함께 로마로 돌아간다.

줄거리는 느슨하다. 제목은 카비리아지만 카비리아가 실제로 나오는 분량은 아주 적고, 하는 일도 별로 없어서 실제 주인공인 풀비우스가 마키스테가 카비리아를 구출하는 영화로 보일 정도다. 그래도 뒤로 가면 갈수록 재미있어진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 본 것은 카메라 기법인데,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간혹 움직이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 정위치에 고정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연기를 한다. 그리고 클로즈업이 없다. 이 영화는 <국가의 탄생>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는데, 얘기를 들어보니 <국가의 탄생> 이전에도 클로즈업이 드문드문 존재했고 그걸 집대성한 것이 그리피스라고는 한다. 하여튼 클로즈업이 없다는 게 연기 스타일에 독특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소포니스바가 자결하는 장면에서는 소포니스바의 종자들과 마키스테가 배경에서 슬퍼하는데, 이 장면은 각자 마임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관람의 또 다른 포인트는 무성영화 시대의 스턴트. 풀비우스가 높은 벼랑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는 장면, 그리고 로마군이 힘을 합쳐서 풀비우스를 성 안에 들이는 장면에서는 특수효과를 사용하지 않은 것 같다. 병사들이 모여서 그 위로 사람을 올리고, 다시 사람을 올리고, 다시 사람을 올려서 드높은 성벽 너머로 사람을 넘기는 걸 영화는 그대로 보여준다. 무성영화 시대의 스턴트엔 항상 과감하고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 그리고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는 장면, 마시니사의 군대가 키르타의 성을 공격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당대의 대작임을 알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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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삼각의 함정>과 <하녀>를 봤다. 이만희의 <삼각의 함정>은 숙모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상속녀와 그 돈을 노리는 불쾌한 악당들의 싸움을 그린 스릴러다. 상상 이상으로 재미있는 영화였다. 갓 복원된 작품이라 그런지 화질도 선명하고. 여주인공 문숙은 연기를 별로 잘하는 것 같진 않은데, 이 세상 사람같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꽃잎 모양의 스티커가 붙은 기타를 치는 모습은 정말 매력적이다. 끔찍한 강간미수 장면 하나. 백일섭이 연기하는 악당 박춘호가 지숙(문숙)을 강간하려고 하는데, 지숙이 박춘호를 깨물면서 저항하자 화가난 박춘호가 지숙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이 영화에서 기억해야 할 포인트는 하나 더 있는데, 돈이 궁한 이상국(오지명)의 알이 하나밖에 없는 선글라스. 그가 궁함을 나타내는데 모자람이 없는 소품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 설명에는 백일섭의 연기가 코믹하다고 했는데, 전혀 코믹하지 않고 끔찍해 보인다. 사투리만 쓰면 다 코믹한 거냐... 백일섭은 느물느물하고 끔찍한 악당 연기를 잘 해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집의 의미인데, 남자 식구가 없는 지숙의 집에는 다른 남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드나든다(지숙은 아파트에 살다가 영화 중간에 단독 주택으로 이사한다). 아파트 관리인, 박춘호, 이상국 등등. 영화에서 남자가 없는 지숙의 집은 집의 중요한 기능인 타인으로부터의 보호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는 것 같다. 심지어 박춘호가 지숙을 강간하려는 장소는 그녀의 집의 안방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은 다리에서 벌어지는데, 이만희 감독의 또다른 영화인 <암살자>를 떠올리게 한다.

김기영의 <하녀>는 벌써 여러 번 보고 있는 건데, 굉장히 피곤하긴 했지만 끝까지 잘 봤다. 더 컨디션이 좋았다면 마지막 부분도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내 심장은 정전이야"와 "안 나가면 찢을 테야"는 하녀의 명대사.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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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만에 정리하느라 기억에서 많이 희미해져서, 메모를 해뒀다고는 해도 빼먹은 내용도 많고 엉망이다. 빼먹은 내용 중에서는 데이비드 린은 인간에 대한 정의를 함부로 하지 않은 감독이라는 말을 적어두고 싶고, 정리한 내용 중에서는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라는 말을 특별히 기억해 두고 싶다)

5월 10일 오후에 <콰이강의 다리> 상영 후 오승욱 감독과 김성욱 프로그래머가 진행하는 씨네토크가 있었다. 오승욱 감독은 먼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영화적인 체험들을 이야기하는데, 처음은 지금은 없어진 장승백이의 강남극장에서 봤다는 <인왕산 호랑이>라는 영화 예고편이다. 두 명의 사나이가 달밤에 결투를 벌이는 장면이 나오고 인왕산 호랑이라는 타이틀이 소용돌이치듯 빙글빙글 돌아서 스크린 가운데에 박히는 것을 보고 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그때는 오승욱 감독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두 번째는 금성극장에서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본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오승욱 감독이 놀란 것은 두 가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한 남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 풀숲에 처박히는 장면과 칼에 사람 머리가 반토막 나는 장면이었다. 오승욱 감독은 <임꺽정>이라는 입체영화를 보고 놀란 이야기도 하는데, 마치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처음 보고 놀란 사람들 같았다고 한다. 그러자 김성욱 프로그래머는 데이비드 린 영화에 기차가 많이 나오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한다.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로렌스가 성냥을 켜는 장면이 매혹적이었다고 하더라면서 오승욱 감독은 웃는데, 자신과는 싹수가 다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자신은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반해...

데이비드 린의 영화에서 사람들이 매혹되는 지점 중 하나는, 로저 에버트의 '데이비드 린의 영화는 눈으로 경험하는 영화'라는 말에서 드러나는 이미지다. 그는 이미지와 이미지를 결합시켜 서사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렇게 한 사람은 데이비드 린 뿐만이 아니지만 데이비드 린은 그것을 가장 대중적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함정이 있다. 보여준다는 것에 대한 욕망에 집착하면 그 어떤 가느다란 끈을 넘는 순간 미치광이가 된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에서도 그런 강박이 심해지는 경향이 나타나는데, 오승욱 감독은 <라이언의 딸>에서 주민들이 폭풍우가 치는 바다로 무기를 건지러 가는 시퀀스를 예로 든다. 저 장면을 얻기 위해 감독은 과연 무슨 짓을 한 걸까? 저 장면을 찍기 위해 배우들은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한 상황까지 내몰려야 했을 것이다. 저렇게 위험한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 영화 감독은 폭군이 되어야 하는데, 그런 것에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데이비드 린은 영화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 감독이라고 오승욱 감독은 이야기한다. 감독은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는가? 이미지에 대한 탐욕을 가진 감독들 중에는 말년이 좋지 않은 감독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구로자와 아키라가 그렇다고 한다. 구로자와 아키라와는 달리 데이비드 린은 마지막 영화인 <인도로 가는 길>까지 가면서도 끝까지 중심을 잃지 않았다고 오승욱 감독은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린이 구로자와 아키라의 길로 가지 않은 것은 관용에 대한 정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데이비드 린은 시나 소설에서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영화를 통해 보여준 감독인데, 그 와중에 그는 끊임없이 관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은 그의 이미지보다 더 중요하게 눈여겨 보아야 될 지점이라고 오승욱 감독은 설명한다. <밀회>를 보면 놀라운 것은 영화가 시작하면서 보여준 시간과 영화가 끝나면서 보여준 시간이 같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이 한 말은 사실은 데이비드 린 감독이 하고 싶은 말 아니었을까? 남편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아내를 받아들이고 용서하는데, 그것은 단순하지만 소중한 관용의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데이비드 린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관용인데, 그것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은 평론가들에게 박살난 <라이언의 딸>이라고 오승욱 감독은 말한다. <라이언의 딸> 마지막 시퀀스는 보석같은 시퀀스라고 오승욱 감독은 말하는데, 영국군 장교와 바람을 피운 아내, 그런 아내와 함께 만신창이가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면서 남편은 아내에게 당당하게 걸으라고, 기운을 내라고 말한다. 대단히 소중하고 다른 어떤 것들보다 가장 많이 이야기되어야 하는 것이 관용 아닌가,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하고 사수되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오승욱 감독은 말한다.

데이비드 린 감독은 거대함 안의 진짜 사소한 이야기를 거대하게 한 감독인데, 10주 동안 촬영이 중지된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주위 사람들을 거의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다. 데이비드 린 감독에게는 악마같은 일화가 하나 있는데, 바로 안소니 퀸에 관한 것이다. 안소니 퀸이 어느 날 감독에게 자신이 영화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자랑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막의 모래언덕 부근에 세트를 짓는데 그가 데이비드 린에게 세트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 더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데이비드 린은 그 말을 선선히 들어줬는데 세트를 옮기는데 2주가 걸렸다. 그런데 세트를 옮긴 얼마 뒤 바람 때문에 모래언덕이 완전히 이동해버린 것이다. 안소니 퀸은 그 뒤로 데이비드 린에게 완전히 꽉 잡혀 버렸는데, 그는 자기 자서전에서 데이비드 린에 대해서는 이 사실 하나밖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감독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면서도 배우를 길들이기 위해서 한 일이고 해서는 안될 짓이었다. 세트를 옮기는데 쏟아부은 수많은 돈과 시간을 생각해보라.

(김성욱 프로그래머인가 오승욱 감독인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어린 시절에 봤을 때는 어떤 쾌감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콰이강의 다리>를 보면 일본군이 장악한 수용소에서 영국군과 미군이 하는 짓에는 낭만적인 면이 있는데, 따져보면 찌질한 것이다. 영화의 구성을 보면 앞의 한시간 동안에는 포로로 잡힌 영국군 장교들이 일을 하는가 마는가를 놓고 영국군 장교 니콜슨(알렉 기네스)과 일본군 포로수용소 소장 사이토(하야카와 셋슈)가 실갱이를 벌이고 40분 동안에는 다리를 지으며 나머지 시간 동안에는 미군 파괴공작원들이 다리를 부수러 온다. 인간들의 사소하고 찌질한 행동들이 거대한 규모의 영화 안에서 보여지는데 지금 같으면 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건 <인도로 가는 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이 정도의 규모와 스케일이 필요할까? 그런데 그것이 주는 묘한 매력과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 족장들이 회의하는 장면이 의미하는 것은 소통의 불가능성 하나 뿐이다. 오승욱 감독은 자신은 전쟁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포로수용소 영화라는 것이다. 믿지 않겠지만 포로수용소 영화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아서 좋다는 것이다. 어차피 서부영화나 전쟁영화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자신은 전쟁영화에서 사람을 죽일 때는 이상하게 견디기 힘들다는 것.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 대단한 것은 대규모 전투씬을 중공군과 싸우는 것으로 하고 동족과 싸우는 것을 보는 관객들의 죄책감을 덜어준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에서 재미있는 것은 일본군과 미군, 영국군이 생각하는 포로의 개념이 틀리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포로의 개념이 전혀 다른 상대끼리 싸운 전쟁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포로가 된다는 것은 전투에서 진 것이지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임무는 탈출해서 적에게 적대행위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포로가 된다는 게 전투에서 진 것 뿐만 아니라 전쟁에서도 진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들은 포로가 되면 할복을 하거나, 아니면 부대의 일급 기밀까지도 거침없이 적에게 털어놓곤 하는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에서는 사이토가 생각하는 포로의 개념과 니콜슨이 생각하는 포로의 개념이 충돌한다. 그래서 사이토는 포로가 되고 나서도 포로의 권리를 찾고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는 니콜슨을 이해하지 못한다. 니콜슨은 사이토와의 싸움에 이김으로써 다리 건설의 주도권을 갖게 되는데, 그가 다리를 짓는 행동에는 인종주의적인 함의가 있다. 제국주의 영국의 우수함을 미개한 원주민과 일본인들에게 과시하려는 것이니까. 사이토가 니콜슨의 요구를 들어준 뒤에 방 한구석에서 우는 장면이 있는데, 그는 니콜슨에게 정신적으로 패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명예에 대한 싸움으로 보이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것을 살짝 바꾸면 허세가 된다는 점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국군 포로들이 대오를 지어 행군하면서 휘파람을 불며 오는데, 카메라는 그들이 신고 있는 너덜너덜해져서 다 떨어진 군화를 비춘다. <콰이강의 다리>는 전쟁을 하고 있는 남성들의 허세를 보여주면서 그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한 것인지 얘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허세를 보여주는데 이 정도 규모가 필요하다고 데이비드 린은 계산한 것 아닐까.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도 <콰이강의 다리>를 염두에 둔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일본군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할 당시, 일본군 장교들은 미군과 영국군 포로들이 떳떳한 것을 보고 그들이 수치심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들은 사무라이 정신을 배우라고 포로들을 다그쳤지만 그런 반면 그들의 당당한 모습에 매혹되었다. 일본인들의 서구에 대한 태도는 동전과도 같이 양면을 지니고 있다. 일본인들은 서양 포로들을 사무라이 정신으로 채우려 했지만 반대 상황이 되자 그들은 적극적으로 친미적이고 친서구적인 길을 걸었다.
존 스터지스의 <대탈주>를 보면 포로로서의 미군과 영국군의 차이도 드러나는데, <대탈주>의 스티브 맥퀸과 <콰이강의 다리>의 윌리엄 홀덴 캐릭터가 겹치는 부분이 있다. 18세기 경부터 전투시 영국군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전진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군복은 빨간색이었는데 그 이유는 옷이 빨간색이면 전투 도중에 튀긴 동료의 피가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관총이 발명된 뒤에는 빨간색 군복은 좋은 표적이 되었기 때문에 군복의 색은 바뀔 수밖에 없었다. <대탈주>와 <콰이강의 다리>의 영국군들은 계획을 세우고 뭔가 성취하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미군들은 즉홍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포로로 살아가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는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영국군이 갖고 있는 영국 신사라는 허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허세가 허세인 것은 약점이 있기 때문이다. 니콜슨과 영국군이 자신들의 허세를 보여주기 위해 하는 것은 결국 이적행위이며 니콜슨이 걱정하는 것은 부하들의 군기 뿐이다. 그런 것을 중시한 나머지 니콜슨과 그의 부하들은 이적행위를 하게 된다. <콰이강의 다리>는 허세라는 것을 끝까지 밀고 갔을 때 생기는 이상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보면 사람이 광기에 빠질 때 망령이 다가오는 것 같은 현현현상이 있는 것 같다. 죽은 줄 알았던 윌리엄 홀덴 캐릭터가 튀어나오는 것도 그렇고. 이 사람이 생각하는 영국성이란 무엇인가? 영국은 식민지를 가지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는데, 어디를 가든 그런 것들과 만나게 된다는 것 아닐까. <인도로 가는 길>의 동굴 에코도 그렇고. <콰이강의 다리>는 기찻길 옆의 무덤과 독수리 등 죽음의 이미지로 시작해서 그렇게 끝날 것이라는 점이 너무나 명백하다. 그리고 그의 영화를 본 관객들은 굉장히 모호한 느낌을 갖게 되는데 데이비드 린은 그런 모호함을 즐겼을 것 같다.

<콰이강의 다리>을 보면 데이비드 린이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시각적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가령 미군 파괴공작원들이 정글에서 일본군을 죽이는 장면에서 큰 박쥐들이 우수수 날아가는 장면, 그런 장면을 도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집념으로 찍었을 것이다. 아마 미얀마에서 영화를 찍었을 텐데, 그런 정글로 들어가려면 영화에서 하는 것과 똑같이 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여주는 데 대한 데이비드 린의 집념이 드러난 것이다. <콰이강의 다리> 이후부터 데이비드 린의 영화에는 자연이 하나의 캐릭터처럼 등장하기 시작한다. 자본도 넉넉해져서 데이비드 린의 영화를 보고 나면 이미지가 각인되는게 많다. 오승욱 감독은 <라이언의 딸>을 보고 나서 집에 가서 존 포드 감독의 <아일랜드의 연풍 The Quiet Man>을 볼 것을 권한다. 퀘이커 교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죄의식에 시달렸던 영국인 감독 데이비드 린과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사나이 존 포드가 아일랜드 사람을 묘사하는 것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거라는 말이다. <콰이강의 다리> 프로젝트는 여러 감독들을 거쳐서 데이비드 린에게 갔는데, 심지어 오손 웰즈도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존 포드와 하워드 혹스에게도 갔는데, 그들은 자기들에게(혹은 자기 나라에게) 식민지를 경영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거절했다고 한다.

이집트 사람들이 피라미드를 지을 때도 그런 고민을 했을 것 같은데, 남들에게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보여주려면 무엇을 얼마만큼의 크기로 지을지 계산을 해야 한다. 그것이 스케일의 개념이다. 데이비드 린 역시 어떤 것을 필름 위에 표현하려면 그것을 어느 정도 크기로 만들어야 할지 대단히 고심했던 것 같다. 데이비드 린은 평론가들에게는 시시한 이야기를 보여주기 위해 거대한 돈을 쏟아부어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 폄하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위해 영화 속에 스케일의 개념을 가져왔고, 거기에 대해 굉장히 고민했다. 사랑 하나를 표현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서 데이비드 린은 <밀회>에서 이별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장면을 하나 툭 보여주고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에 그것을 다시 보여준다. 처음에 여자의 손 위에 살짝 얹히는 남자의 손의 의미와 나중에 다시 보여주는 그 장면의 의미는 전혀 틀리게 다가온다. 60분 동안의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그 사랑의 크기를 오롯이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는 이미지가 아니다. 아름다운 이미지만 보고 싶으면 사진을 보면 된다. 그런 일은 사진 작가들이 오히려 더 잘할 것이라고 오승욱 감독은 말한다. 데이비드 린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압도저인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시키면서 놀라운 이야기와 시간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영화가 여기까지 온 데에는 데이비드 린이 기여한 바가 크지만 그는 너무 많은 비판을 받았고 과소평가된 감독이다. 오승욱 감독은 기존의 평가에 얽매이지 말고 편안하게 영화를 볼 것을 주문한다. 오승욱 감독, 김영진 평론가, 김성욱 프로그래머 등이 공히 언급하고 추천하는 데이비드 린의 영화는 <밀회>이고, 거기에다 <위대한 유산>의 첫번째 시퀀스는 꼭 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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