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06 04:08 영화 리뷰

경계도시 2


경계도시 2 (The Border City 2, 2009)


감독 : 홍형숙
출연 : 송두율, 정정희

(존칭은 생략한다. 그리고 이 글은 송두율의 저작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상태에서 송두율이라는 인물과 사상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쓴 것이다)

[경계도시 2]와 [경계도시]를 연이어 보면서 일단 궁금했던 것은 사소하고 사적인 문제였다. [경계도시]에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돌아오라고 조언했던, 송두율이 한국에 돌아오길 바라마지않았던 김지하는 한국에서 송두율을 만났을까 만나지 못했을까. 그가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는 사실 앞에 배신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그가 고초를 겪는 것을 보고 미안함을 느꼈을까.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서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속에서 되살아나는 것은 90년대 중후반에 일어났던 온갖 사회적인 사건들과 그에 얽힌 개인적인 경험담(영화와 직접 관련 있는 사건은 아니었지만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어디서 무엇을 하시는 누구인지 이름도 나오지 않는 학창시절 은사님에 대한 씁쓸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이 글에서 떠벌일만한 건 아니고 친한 사람들에게는 나중에 얘기해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화를 통해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은 송두율은 남한보다는 북한에 훨씬 기울어진 사람 아닌가 하는 것.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보면서 눈에 밟히는 것은 그런 점이었다. 송두율이 조선노동당 입당을 형식적인 절차로 여겼다면 김대중 정부 시절 국정원에서 요청했던 준법서약서는 왜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준법서약서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인데 조선노동당이라는 특정한 정당에 입당할 것을 강요하는 행위 역시 그의 정치 및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노동당에 가입했다. 영화는 송두율이 순진했기 때문에 이런 사태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묘사하지만 오히려 그는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는 것을 남한 사람들, 남한 사회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고 있었고, 그래서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는 데까지 감춘 것 아니었을까. 영화에서 송두율이 김형태 변호사와 정면돌파 하자고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추론이 옳다면 송두율 자신이 감히 그런 문제까지 정면돌파를 시도할 만큼 순진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여기서 남한의 정보기관과 대면했을 때 그 문제가 밝혀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면, 남한 정보기관에 의해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큰 어려움 없이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또 송두율이 지나치게 순진했다는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리고 또 하나. 송두율이 재판받는 부분에서 법정의 검사측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경계인으로 살고자 했다면 남한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처럼 북한의 모순도 비판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물론 보수진영에서 진보진영을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투적인 수작이기는 하지만 내용을 보면 이 점을 결코 쉽게만 생각할 수는 없다. 역설적이지만 우리 사회가 점차 민주화되면서 북한이 얼마나 사람 살만한 곳이 못 되는지가 밝혀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송두율은 [경계도시]에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지만 북한이 그런 이데올로기 이상의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사회라는 것은 지금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송두율 역시 북측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면 좀 더 빨리 깨달았어야 하지 않을까.

영화에서 명백하게 선언하지는 않지만 이런 저런 정황으로 볼 때 북한에서 송두율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 송두율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김철수라는 가명으로 활동하도록 한 것, 형식적인 절차라고 쳐도 조선노동당에 입당하도록 한 것 등이 그렇다. 송두율을 대하는 북한과 남한의 태도를 보면 북한은 포섭하려고 하고 남한은 배제하려고 하는데, 소비에트의 몰락 이후 체제의 정당성을 선전해야만 하는 북한과 이미 국제사회에 편입되었고 체제 경쟁에서는 앞서나간다고 자부하는 남한의 입장 차이 아닐까? 더 정확히 말하면 남한의 지배세력의 중추를 이루는 보수 세력은 송두율을 국내 정치에 이용했고 북한은 대외 선전용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몇 가지 사실 때문에 송두율이 노동당 정치국원으로 활동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오히려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송두율이 단순한 친북 지식인이 아니라 진짜로 권력을 가진 인물이었다면 자신이 남한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모를 리가 없고, 또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북한의 권력서열 23위라는 인물이 남한에 억지로 들어와서 재판을 받는 걸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송두율 교수가 구속되면서 활발하게 일어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그 불씨를 당기기 위해? 송두율이 예수도 아니고, 설령 그런 살신성인의 자세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리라는 것까지 예측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앞에서 송두율이 북한에 더 가까운, 친북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남한 출신인 그로서는 당연한 것 아니었을까. 기자회견장에서인가 어떤 기자가 송두율에게 북측의 입장에 더 가까우므로 경계인이 아닌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남쪽 진영에 있던 사람이 남도 북도 아닌 경계에 서고자 하면 북쪽에 더 가까워지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닐까.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이명준처럼 남에서도 북에서도 멀어지고자 한다면 그때는 어떤 입장에서도 가까워지지 않는 경계에 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송두율은 양쪽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쪽 모두에 가까운, 그래서 통일의 다리가 되는 경계인이 되고자 했으며 이것이 그의 근본적인 비극이자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양쪽 모두에 가깝고자 하나 박해받을 수밖에 없고 그럼으로써 진정한 경계인이 될 수 있다는 역설. 형제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70년대의 서승, 서준식 형제를 비롯해서 비슷한 입장을 취한 사람들도 이런 고초를 겪었다. 모르긴 몰라도 북한에서도 송두율에 대해서 겉보기만큼 호의적이지는 않지 않을까?

남한의 보수 진영이 그를 국내 정치에 이용했다고 말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하고 싶다. 내 기억으로 2003년 무렵 남한의 보수 진영은 정권 탈환 실패로 인한 위기를 이념 논쟁을 이용해서 탈출하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이런 흐름 아래서는 순진한가 순진하지 않은가가 중요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으로서는 예측하기 힘든 정치적인 흐름이 있었고, 그것은 송두율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평생 남한에서 활동했던 김지하가 순진하고 어리바리해서 송두율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했던 것인가? 여하튼 송두율 사건이 일어날 때 대한민국은 여당과 정부에 이념 공세를 취하던 당시 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카드를 빼들고 그것 때문에 오히려 역풍을 맞아서 총선에서 대패하는 흐름으로 가게 되었고, 총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당시 여당에서 의지가 있었다면 국가보안법 철폐 문제도 진지하게 다뤄볼 수 있었을 테지만 흐지부지하고 만다.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명박 대통령이 지배하는, 그리고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거꾸로 다수당이 된 지금 사람들은 국가보안법이란 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억눌린 진실이 귀환하는 날이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는 송두율이라는 한 인간을 바닥까지 몰아붙였던 그런 나라다. 국가보안법과 극단적 반공주의가 엄존하는 우리 사회는 마치 공동묘지를 밀어내고 그 위에 학교를 세웠다는, 그래서 언제 귀신이 나올지 모르는 옛날 학교괴담의 배경이 될 법한 그런 곳이다. 그래서 [경계도시]라는 다큐멘터리는, 나는 그것이 감독 스스로가 주장하는 거리두기라는 원칙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는 잘 모르겠고(1편과 비교해서 보면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는 물론 확연하게 드러나지만) 심지어 다른 빼어난 다큐멘터리보다 더 재미있고 충격적이라고 느낀 것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나와야 하고 사람들이 봐야 하는 시의적절한 다큐멘터리, 충실한 기록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원칙은 이명박 정권 아래서 많이 후퇴했다. 개인적으로는 후퇴하는 것도 어느 선 이하로는 절대 내려가지 않을 것이고 길게 보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천천히 올라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가 후퇴했을 때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느 선 이하로는 절대로 후퇴해서는 안 될 것인지 이정표가 필요하다. 이 다큐멘터리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Wolverine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여성의 정체]와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 보다. [여성의 정체]는 이상한 영화다. 주인공인 니콜로는 아내와 헤어진 영화 감독인데, 초반에 이상한 사내를 만난다. 그 남자는 니콜로한테 지금 만나는 여자와 헤어지라고 하는데 그 남자와 만난 다음에 니콜로는 동생이 운영하는 산부인과에 가서 장난을 치다 만난 마비라는 여자와 사귀게 된다. 그리고 니콜로는 마비네 집에서 마비와 자기를 떼어놓기 위해 사람을 붙였다고 의심하게 되는데, 결국 마비는 중간에 사라져버리고 니콜로는 마비를 찾아다니다 만난 이다라는 여자와 다시 사귀게 된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이다는 사실은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면서 결혼해 달라고 요구하는데... 니콜로는 그녀와 결혼할 것인가 말 것인가? 영화를 보면 시간과 인과관계가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마비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니콜로를 속이고 있어서 어떤 말을 믿어야 되고 어떤 말을 안 믿어야 될지 알 수 없다. [여성의 정체]는 홍상수 영화를 본다고 생각하면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로코와 그의 형제들]은 이번이 세 번째 보는 것인데 볼 때마다 천사 같은 알랭 들롱에게 감탄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1년에 한번씩은 봐야 되는 영화의 목록이 있다는데, 내가 나중에 그런 영화 목록을 만든다면 [로코와 그의 형제들]도 올려놓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Wolverine

드디어 [순응자]를 봤다. 전에 시네마테크에서 봤을 때나 부산에서 봤을 때는 모두 중간에 졸아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처음 보는 영화는 무조건 좋은 컨디션에서 봐야 한다는 모 평론가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지금까지 본 베르톨루치 영화들은 [1900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사랑] 이 정도인데 이 중에서 그래도 가장 낫다고 느낀 것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고, [순응자]는 그보다 더 괜찮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본지 한참 후에 영화평론가로 활동하시는 모 선생님께 왜 [순응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여쭤봤더니 영화가 너무 장식적이라, 싫어하는 게 이해는 간다고 말씀하시더라. 물론 그분은 강의 시간에 [순응자]의 한 장면을 보여주실 정도였으니까 이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중에 [순응자]와 베르톨루치에 관한 에피소드를 더 말씀해 주셨는데, 베르톨루치는 부르주아 집안에가다 아버지가 유명한 시인,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베르톨루치는 18세 때 시를 써서 어디서 큰 상을 받았는데 도저히 아버지만큼 잘 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화로 진로를 틀었고, 그때 가깝게 된 사람이 고다르와 파졸리니. 파졸리니의 장편 데뷔작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주위의 천재들, 특히 고다르에 대한 열패감 속에서 만들어 낸 영화가 [순응자]이며 이 영화에서 암살당하는 콰드리 교수가 바로 고다르라는 것이다(콰드리 교수의 집주소, 아내의 이름 등등). 재미있는 애기를 몇 가지 더 들었는데 안나 역으로 출연하는 도미니크 산다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걸어오는 모습은 마를렌 디트리히의 인용이며 그의 영화엔 그렇게 영화광스러운 장면이 많다는 이야기. 강의 시간에 보여준 것은 후반부에 카페에서 군무가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워크를 통해 마르첼로가 '덫에 걸린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영화의 결말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마르첼로가 파멸했다는 것인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이 내적인 파멸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쨌든 사회적인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까지 배신하면서 그럭저럭 살아남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어쩐지 [순응자]와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해방 후의 우리나라에 대입시켜서 보게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Wolverine
심야에 씨너스 단성사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인빅터스]를 봤다. 나쁘다고 할 만큼은 아니지만 [그랜 토리노]의 엄청난 감흥에 비교하면 조금 아쉬운 느낌인데... 가장 좋았던 장면은 피나르(맷 데이먼)가 만델라(모건 프리먼)가 수감된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이 일하던 강제 노역장을 보고 그가 일하는던 환영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새삼스럽게 느낀 것은 정치에서 스포츠를 이용하는 것은 양날의 칼이라는 점이다. 만델라는 럭비를 국민 통합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만 그와 반대로 전두환 정권은 3S 정책의 일환으로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 이런 맥락에서 출범시킨 프로야구는 오히려 각 지역간의 분열과 갈등, 편견을 조장하는 면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프로야구가 지역간 화합을 촉진하는 쪽으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보기보다 훨씬 복잡하게 작동하는데 가령 WBC 같은 국제 대회에는 프로 선수들이 출전하고, 그것이 어느 정도 국민 통합의 기능을 하고 있다.
만델라의 정책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물론 영화 속에서는 흑인들과 백인들이 서로 기뻐하고 그것은 각자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들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는 거기까지 나아간 것만 해도 큰 발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만델라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겠지만 그걸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게 아니고, 중요한 것은 상호 이해와 더불어 경제적 사회적 불평등의 해소인데 지금 남아공 사회의 모습은 어떠한가? 현재 남아공 사회의 흑인들의 처우가 예전보다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여겨지는 것은 [디스트릭트 9]에서 묘사된 외계인들의 게토와 [인빅터스]에서 비쳐지는 만델라 집권 당시 남아공 빈민촌의 모습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디스트릭트 9]의 외계인 게토는 현존하는 남아공 빈민촌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20년이 지나도록 그게 남아있다는 말은 일정한 수의 남아공 흑인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빈민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나는 럭비의 럭자도 잘 모르지만 조나 로무의 이름만큼은 알고 있다. 190이 훌쩍 넘는 키에 몸무게가 120인 엄청난 거구로 100미터를 10초대에 끊는 믿을 수 없는 순발력, 신장염으로 의사로부터 남은 평생을 휠체어에서 보내야 된다는 선고를 받았지만 이를 이겨내고 다시 복귀한 남자. 그리고 뉴질랜드 럭비 대표팀의 상대를 압도하는 하카. 영화에서는 둘 다 기대에 못 미쳐서 아쉬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Wolverine
비토리오 데 시카의 [구두닦이]를 봤다. 영화가 시작되면 영화 제목과 함께 사람 없는 감옥 안의 풍경이 정지화면으로 나온다. 이곳이 영화의 주인공인 아이들이 들어가게 되는 소년원이다. 2층으로 되어 있으며 화면 오른편으로 아이들이 묵고 있는 창살달린 감방이 있고 창문을 통해 햇살이 가운데로 들어오는 것 같다. 영화의 주인공은 파스쿠알과 주세페라는 두 꼬마인데 파스쿠알이 더 큰 편이다. 시대적 배경은, 영화 후반부 소년원에서 신부들이 영화를 상영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미군 기록 영화가 나오는 걸로 보아 독일이 이탈리아를 점령했다 물러간 1944년 혹은 1945년 초로 보인다. 둘은 말을 갖기 위해 열심히 구두를 닦는데 돈이 약간 모자라던 차에 주세페의 형을 통해 밀수품 판매를 돕게 된다. 그들은 한 점술가에게 담요를 건네주고 그 돈으로 말을 사지만 나중에 경찰에게 잡히게 된다.
두 친구는 돈독한 우정을 갖고 있었지만 주위 상황은 아이들이 그걸 지키지 못하도록 만든다. 파스쿠알과 주세페는 사실 착한 아이지만 어른들에게는 그저 위험한 비행청소년일 뿐이다. 소년원에서는 다른 밀수범들을 잡기 위해 주세페가 구타를 당하는 것처럼 파스쿠알을 속인다. 그래서 파스쿠알은 주세페 형의 이름을 불어버리고 그것 때문에 주세페는 파스쿠알을 원망하게 된다. 그리고 재판. 주세페네 변호인은 모든 잘못을 파스쿠알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한다. 파스쿠알은 부모가 없어서 국선 변호인이 선임되는데 이 변호인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죄 판결을 받아내지는 못하고 파스쿠알은 2년, 주세페는 1년 형을 받는데 주세페는 같은 방에 수감된 아이들을 따라 탈옥해버린다. 주세페가 말을 팔아버릴 거라고 생각한 파스쿠알은 소년원장에게 주세페가 어디로 갈지 안다고 말해버리고 그를 잡으러 따라나간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아이들을 극도로 불신하던 소년원장의 망연자실한 표정은 이게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느끼고 있지만 돌이킬 수는 없다. 전쟁과 가난은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도록 만들고 아이들은 착하지만 어른들의 악행을 무의식 중에 자기 안에 갈무리한다. 파스쿠알이 허리띠를 풀어서 주세페를 구타하는 장면은 그것을 충격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에 있는 영화 소개에 있는 말은 여기에도 적어두고 싶다. "이 영화를 본 후 린지 앤더슨은 <시퀀스>에 이탈리아 영화가 관객을 압도하는 요소로 사실성, 진실함 그리고 우리가 인간적인 가치라 규정하는 것들에 대한 열렬한 간청이라고 적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Posted by Wolverine
이전버튼 1 2 3 4 5 ... 117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편하게 생각하자.
Wolverine

공지사항

Yesterday138
Today29
Total634,124

달력

 « |  » 2014.07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