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갑자기 (Suddenly in Dark Night, 1981)

감독 : 고영남
각본 : 윤삼육
출연 : 김영애, 윤일봉, 이기선


이 영화는 80년대 말 여곡성과 더불어 MBC TV에서 방영된 뒤 화제를 모았던 공포물입니다. (금요일 밤 납량특집이었던가요. 우리나라 공포물만 골라서 방영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끝에서 두 번째 작품이었을 겁니다. 여곡성 바로 한 주 전에 상영되었죠) 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목각인형의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있었습니다. 이제서야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줄거리를 보면, 곤충을 연구하는 대학 교수이자 나비 채집광인 강유진 교수가 동굴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됩니다. 교수는 희귀종을 찾았다며 동료 교수들을 불러 슬라이드를 보여주는데, 나비 사진들 틈에 이상한 목각인형 사진이 한장 끼어있어요. 그걸 본 강교수의 부인 선희는 이상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며칠 후 다시 나비 채집을 떠났다가 이상한 여자아이를 하나 데려오는데, 남편은 열아홉살 짜리 미옥이라는 아이가, 부모가 죽은 후 갈데가 없어 하는 것을 데려왔다고 말해요. 미옥은 용주산(용두산?) 산신령의 정기를 받았다는 목각인형을 갖고 있습니다. 미옥의 어머니가 불타 죽기 전,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며 건넨 물건이라며 미옥은 인형을 떼놓지 않으려 하죠. 그것을 알기 이전, 선희는 미옥을 직접 씻기면서 미옥이 매우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선희는 남편과 미옥이 사랑을 나누는 환각을 보게 되고, 목각인형의 망령에 맞서 집을 지켜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입니다.

선희와 미옥이라는 인물은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지성미/백치미,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학자의 부인/무당의 딸,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30대 여성/아름다움이 한창에 달한 19세 여성. 그리고 영화 속에서 한 인물이 슬쩍 마녀 이야기를 꺼내는 바, 선희는 미옥이 자신의 집안을 파멸시킬 악의 근원(즉 마녀)이라고 생각하죠. 자신에게 그 마녀에 맞서 집안을 수호할 임무가 있음을 철석같이 믿고. 그러나 이 영화는 선희의 편집증이 정당한 근거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닌가를 숨깁니다. 선희가 남편과 미옥이 정사를 나누는 환각 장면에서도 그것이 환각인지 아닌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죠. 미옥이 진짜 마녀인지, 목각인형의 악령이 존재하는지, 선희가 미친 것인지, 누가 물어보면 저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근본에 있는 것을 들여다보면 아름다움을 잃어간다는 것, 젊고 아름다운 여자가 나타나 남편을 빼앗아간다는 것에 대한 한 상류층(중산층?) 여성의 극도의 공포감을 느낄 수 있어요. 어쨌든 선희가 미쳐간다는 것 하나 만큼은 사실이고요. 카메라는 미옥의 나신을 세세히 훑어가는데, 미옥은 영화에서 사실 큰 일을 하지는 않지만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 그녀가 아름답다는 것 한가지 만으로도 뭔가를 만들어냅니다. 대단하죠. 그녀의 반대편에서 그녀를 주시하는 선희의 질투, 공포와 그녀의 아름다움이 빚어내는 화학작용이에요.

어설프게나마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이 영화를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선희의 남편 강유진은 대학 교수로서 사회에서 인정받는 남편입니다만 아내의 고통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합니다. 고통을 호소하는 아내에게 그가 하는 말은 고작 정신감정이나 받으라는 거죠. 미옥이 죽은 후 선희가 목각인형을 버렸을 때도 남편은 예의 그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은 후 목각인형을 안방에 모셔놓고 버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을 정도로 가혹하죠. 남편을 초자아, 즉 슈퍼 에고로 상정한다면 선희는 자아, 그리고 가스렌지를 어떻게 쓰는 지도 모르는 순진무구한 아름다움의 소유자, 그와 동시에 (선희가 믿어 의심치 않는) 악마성을 소유한 미옥은 이드가 되겠죠.

이 영화는 극도로 심리적이며 팽팽한 긴장을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의 절정부를 이루는 선희와 목각인형 악령의 싸움이 생각했던 것보다 무섭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죠. 혼란스럽고 이상한 결말도 매력적이고. 윤일봉씨의 엄숙한 도덕주의자 연기나 김영애씨의 미쳐가는 상류층 여성 연기모두 어색하지 않았는데, 이 영화를 어렸을 때 보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깊은 밤 갑자기>를 보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김영애씨 연예계 은퇴 기사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네요. 늙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말도 괜한 생각을 하게 만들고.

- 2004. 8. 29
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