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 3 (한나라 말기)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푸른역사, 2002
일찌기 제갈량은 출사표를 통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기에 전한이 흥성했으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했기에 후한이 몰락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한 말기의 정치를 보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신 석현(石顯)의 세력은 성제가 즉위하면서 소탕되었지만 성제(成帝)는 외척인 왕씨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다. 왕씨의 우두머리인 왕봉(王鳳)은 두흠(杜欽)을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기도 했고 왕씨 가문에서는 간혹 강직하고 훌륭한 인사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왕봉은 정적인 왕상(王常)이나 왕장(王章) 같은 인물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황제도 눈살을 찌푸릴만한 심한 사치를 누렸고, 성제 자신은 후에 여색에 빠져 황후를 폐위하고 조비연(趙飛燕)을 대신 황후로 삼기에 이르렀다. 또한 성제 치하에서는 외척뿐 아니라 순우장(淳于長) 같은 간신들이 등장하게 된다. 애제 시대에는 왕씨의 세력이 쇠퇴하였으나 부태후(傅太后)를 중심으로 한 애제의 외척들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은 동현 등이 권세를 떨쳤다. 황하에서는 수재가 되풀이되었으며 한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다. 간간이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민심이 조금씩 이반했던 것 같다. 왕망(王莽)은 이때 등장했다.
성제와 애제(哀帝) 곁에는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있었고 왕도 외척들의 권력 독점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끝내 외척이나 권신들을 저버리지 못했다. 이 무렵 눈에 띄는 것은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의 우유부단함인데, 외척이나 총신을 감싸고 잘못이 있어도 확실하게 내치지 못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효성황제 시절에 정권이 왕씨의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던 황제(애제 : 글쓴이 주)는 즉위하자 대신들을 죽이면서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고, 무제와 선제를 본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믿었으며,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대업은 이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p.374)
왕망은 성제의 외척인 왕씨 집안 출신으로 왕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는 다르게 인망이 있었다. 왕망은 자신을 낮추고 관직에 임용된 뒤에는 강직한 정치를 펼쳐 인심을 얻었지만 자치통감에서는 왕망이 인심을 얻기 위해 교활한 처세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애제가 붕어한 뒤 태후인 왕정군(王政君)을 등에 업고 집권한 왕망은 외척 세력과 조정에 있던 간신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는데, 그 뒤로 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저항이 없다. 이건 정말 미스테리다. 그나마 바깥에서 왕망에 저항하는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나긴 했으나 너무나 쉽게 제압되었고, 조정 안에서는 왕망에 반대하는 움직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왕망의 독단적인 정치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사직하는 등 소극적인 처신으로 일관했고, 그나마 왕망의 아들인 왕우(王宇)가 일으킨 여관(呂寬)의 사건 같은 것도 어떤 움직임이라고 보기엔 힘들 것 같다. 밖에서 반란이 거의 벌어지지지 않은 것은 유씨 성 가진 제후들의 세력이 계속해서 쇠퇴해 왔기 때문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겠지만 안에서 이토록 저항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치통감> 3권에서는 왕망이 황제로 등극한 후 벌어진 실정과 적미(赤眉)의 봉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등장을 서술하는데 왕망이 세운 신의 실패를 보면
1. 대외 정책의 실패(사이四夷들이 왕을 칭하는 게 고대의 제도에 위배된다는 뜻에서 흉노의 인수를 왕공의 도장에 넣는 새璽 대신에 제후의 도장에 넣는 장章을 새긴 도장으로 바꿔 주었는데 이는 "선우의 인새와 다른 신하의 것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pp.480-481)다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신에서는 흉노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신은 고구려와도 마찰을 일으켰으며 다른 민족들의 반란도 이어졌다)
2. 경제 정책의 실패(한대에 유통되던 오수전 대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키려 했으며 화폐 제도의 혼란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는 물가안정책인 오균五均과 전매제도인 육관六筦 같은 제도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 제도의 미비 혹은 잦은 교체(여러 군이나 봉국에 소속된 관할 구역을 다시 나누고, 없애거나 새로 설치하거나 바꾸어서 천하에는 일이 많아졌고 관리들조차 고쳐진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다. p.423 또 제도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여 명령이 매우 번잡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을 시행하려고 할 때 번번이 물어서 일을 처리하였는데, 이런 일이 앞뒤로 계속 이어져서 한 가지 일을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다음 일을 벌이는 식이었다. 왕망은 항상 새벽이 되도록 등불을 켜고 나라 일을 돌보았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p.529 혹은 왕망이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위로는 공후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리까지 모두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왕망의 제도가 번잡스러운 것이 이와 같아서 세금을 부과하지만 계산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수가 없었고, 관리들은 끝내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관직을 통하여 부정한 행위를 하고 뇌물을 받아서 스스로 생활하였다. pp.530-531)
4. 유능한 신하들을 믿지 못하여 처형하거나 면직시킨 사례가 극히 많고, 기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
5. 후에 신선을 믿게 되면서 큰 공사가 빈번히 발생하여 국가 재정을 좀먹음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왕망 정치의 실패는 유가적 이상주의의 실패로 보인다.
"왕망은 속으로 제도가 정해지면 천하는 자연히 태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리를 깊이 생각하며, 예의를 제정하고, 성악(聖樂)을 만들며, 육경(六經)에 합당한 이론들을 강구하였다. 공경들은 해 뜨면 입궁했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몇 년을 논의해도 결정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송 등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령이 빈 자리가 되어 몇 년이 지나도 태수가 여전히 겸직하고 있으니 탐욕스럽고 잔학한 짓이 날로 심해졌다."(p.528)
봄, 정월에 흉노인 호한야선우가 장안에 와서 입조하며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한나라와 친해지기를 원하였다. 이에 황제는 후궁 가운데 양가자(良家子)인 왕장(王嬙),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내려주었다. 선우는 환영하며 즐거워하였다.(p.57)
솔직히 이제까지는 왕소군을 전설속의 인물로만 생각했다. <자치통감>에는 왕소군의 아들이 나중에 흉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황상이 미행을 하다가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노래하고 무용하는 조비연(趙飛燕)을 보고 반하여 궁궐로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 후로 조비연은 크게 총애를 받았다. 조비연에게 여동생이 있어 이를 다시 불러들이니, 자태와 성품이 더욱 농염하고 순수하여 좌우에서 모두 쉬지않고 감탄하였다.(p.161)
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출 수 있었다던 그 조비연. 조비연의 행실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애제 사후 정권을 잡은 왕망에 의해 폐위되자 자살하였다.
부마도위(駙馬都尉) 겸 시중인 운양(섬서성 순화현) 사람 동현(董賢)은 황상에게 총애를 받아서 황상이 나갈 때에는 참승(參乘) 하였으며, 들어와서는 황제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상으로 받은 재물이 거만(鉅萬)이나 되었고, 그 귀함은 조정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항상 황상과 더불어 잠자고 일어났다.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옆에 있는 황상의 옷소매를 베고 잠이 들었다. 황상이 깨어 일어나려 해는데 동현이 잠에서 깨지 않자 동현을 깨우고 싶지가 않아서 마침내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p.323)
이 일 때문에 동성간의 애정을 나타내는 단수지벽(斷袖之癖)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성제 시대의 부평후(富平候) 장방(張放)은 황제와 잦은 연회를 벌여 간신으로 지탄을 받았는데 황제가 붕어하자 곡하다가 죽었다. 이에 대한 평가. "장방이 황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충성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충성심이 없으니, 어짊을 해친 사람입니다."(p.259)
같은 달에 전휘광(前煇光, 장안시 남부) 사람인 사효(謝囂)가 무공(武功, 섬서성 무공현)의 현장인 맹통(孟通)이라는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하얀 돌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위는 둥그렇고 아래는 네모로 되어 있으며 붉은색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다고 상주하였다. 그 글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고 씌어 있었다.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징표를 주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p.431)
또 유자라고 하였던 유영(劉嬰)의 유모에게는 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항상 사방이 벽면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육축(六畜)의 이름조차 모르게 하였다.(p.465)
왕망이 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유영에게 한 짓을 보면 여후가 척부인을 인간 돼지로 만든 것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인다.
적의(翟義)의 일당인 왕손경(王孫慶)이 체포되었다. 왕망은 태의(太醫)와 상방(尙方, 주방 담당자), 그리고 기술 좋은 백정들을 시켜서 그의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겨서 오장을 꺼내게 하였다. 그런 뒤 대나무를 가늘게 만들어 그의 혈관을 따라가면서 처음과 끝나는 곳을 알아보고는 병을 고친다고 하였다.(p.534)
그러나 이런 기록을 보면 왕망의 잔혹함에 대한 <자치통감>의 기록은 과연 믿을만한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서 인간의 혈관과 그 역할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또 특이한 기술을 갖고 있어서 흉노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널리 모집하면서, 보통의 순서와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니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수가 1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어떤 이는 물을 건너는 데 배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말들의 머리와 꼬리를 잇게 해서 100만 명의 군사를 호송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또 어떤 이는 한 말의 양식을 갖고 가지 않아도 약물만 먹으면 군대 전체가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하루에 1,000리를 날아갈 수 있어서 흉노를 정탐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왕망이 이 사람의 재능을 시험해보았더니, 큰 새의 깃털을 가지고 두 개의 날개를 만들어서 머리와 몸에 붙이고 고리와 끈으로 조종하는데, 수백 걸음을 날아가다가 떨어졌다.(p.544)
이건 아마 인류 최초의 비행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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