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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 (Epitaph, 2007)

감독 : 정가형제
출연 : 진구, 이동규, 김태우, 김보경, 고주연, 지아, 전무송, 엄지원


<기담>을 보고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시대와 영화가 정말 느슨하게 이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기담>의 주요한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42년 겨울과 그 뒷이야기에 해당하는 1979년 10월은 일제의 패망과 해방, 그리고 박정희의 죽음과 군사 쿠데타, 5공화국 등장이라는 격변을 눈앞에 둔 혼란한 때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비쳐지는 시대상은 여유롭고 따뜻하기 그지없다. 가령, 대학 강의실에서 박정남 교수는 학생들에게 데모 나간 학생들 보면 시험 꼭 보라고 전해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수업을 끝낸 박정남 교수가 캠퍼스를 걸으면 그 근처에서 유신 철폐 따위의 피켓을 든 학생들이 꼭 소풍을 가는 것처럼 어슬렁거리는 게 보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본 사람들이라면 학생들이 캠퍼스에 전단 몇 장 뿌리고 사복경찰에 쫓겨 도망가던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때 대학 당국도 운동권 학생들을 곱게 다루지 않았으니 저런 느슨한 데모가 가능할 리 없는 것이다. 사건들을 하나로 이어붙이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아키야마 소좌도, 일본 군인이 아니라 마치 탐정처럼 묘사되고 있다. 아키야마 소좌는 확실히 한국 영화가 보편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일본 군인들보다 훨씬 긍정적인 인물인데, 그건 아마 이 사람이 군인이 아닌 탐정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이 자국 군인 한 명이 살해당했다는 이유로 민간에서 벌어진 사건의 수사를 맡는다?

가만히 보면 이 영화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당시 시대 상황과 별 관련이 없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기담>의 시대적 배경이 반드시 1942년이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굳이 1942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정한 것은 영화의 주제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말하기로 하자. 이 영화에서 또한 중요한 것은 감독이 시대를 빌어서 이때가 아니었으면 볼 수 없는 장면들을 그려내고 있다는 것인데, 그 중 특히 인상 깊은 하나는 기모노 입은 여인의 이미지였다. 안생병원의 원장은 딸의 영혼결혼식을 치르면서 엎드려 곡을 하는데, 그때 그녀의 옷차림은 꼭 달팽이가 집을 등에 얹은 것처럼 보인다. 달팽이라는 곤충은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수시로 등장하며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가 되는데, 등에 얹은 집처럼 결코 벗어던질 수 없는 끈끈한 집착과 애정이 달팽이를 빌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달팽이는 영화의 기묘한 분위기와 썩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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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세 가지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의 두 에피소드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시간적 순서는 마지막 에피소드를 통해 분명해진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을 모으면 병원의 주요 인물들이 며칠 사이에 죽음을 맞이하는, 안생병원 멸망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야기가 되지만, 그 죽음들이 어떤 필연적인 끈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 죽음들은 공통된 정서를 보여주고 있다. 각 에피소드 세 편의 주인공은 병원에 실려 온 죽은 소녀와 안생병원 학생인 박정남,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한 소녀 아사코와 의사 이수인, 안생병원의 의사 김동원과 김인영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한쪽은 죽은 사람, 혹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며 다른 한쪽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쪽이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끼며 다른 한쪽에게 집착하는 구도가 반복되고 있으며, 그 집착과 쓸쓸함은 다른 한쪽의 죽음을 부르는 것이다. 죽은 사람은 살아있는 사람의 남은 인생에 달팽이처럼 달라붙거나, 혹은 그를 곧장 데려온다. 그러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이 구도가 하나의 허상으로 작동한다.

<기담>에도 깜짝쇼는 있다. 그러나 다른 영화와 비교해보면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차분하게 감정을 쌓아 올려간다는 것이 <기담>에서 가장 좋은 점이다. 가령 노인이 된 박정남이 자신을 찾아온 딸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을 보면, 교복을 입은 여고생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그들의 옆자리에 앉아 있다. 그 여고생의 정체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밝혀지지만,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 장면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그녀가 귀신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무 음악도 없이 덤덤하게 부녀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모습과 그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귀신을 보여주는 연출은 굉장히 드문 것이 아닌가? 얼어붙은 호수의 얼음장 밑에 보이는 소녀의 시체 위로 붉은 심장 모양의 꽃잎이 날아오는 등의 아름다운 장면들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관객들이 뇌리에서 지울 수 없는 것은 두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귀신이다. 아사코 엄마의 귀신과 그 뒤에 등장하는 할머니의 귀신은 영화의 다른 귀신들과 달리 실재하는지, 아니면 아사코의 환각인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 귀신들은 아사코의 죄책감을 강력하게 반영하는 존재로, 특히 아사코 엄마의 귀신은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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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기담>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혀를 내두를 만큼 좋지 않다. 심하게 말하면 영화를 망쳤다고 할 정도로. <기담>은 공포보다는 외로움이라는 정서를 전달하는 데 더 공을 들였다는 느낌이 드는데,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상하리만치 반전과 살인에 집착하고 있다. 그 반전은 굉장히 산만하고 이상하여 말로 표현하기도 힘들 정도이며, 살인은 더더욱 그렇다. 부산에서 경성까지 문서를 전달하던 일본 군인이 살해당했기 때문에 군에서 수사에 나선 것으로 보이는데, 그 뒤로 희생된 사람은 조선인 탈영병, 거지 아이, 안생병원의 간호원 등이다. 그러면 일본군을 노린 살인이라는 가설은 폐기되어야 하고 수사는 경찰에서 맡게 되지 않겠는가? 그런데 왜 아키야마 소좌는 거지 아이의 시체를 두고 일본군을 노린 연쇄살인 운운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가? 더욱 이상한 것은 동원-인영인데, 왜 그가 일본군은 물론 무고한 어린아이까지 살해하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가 없다. 몽유병?
또한 인영이 아키야마 소좌를 찌르는 장면에서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사이코>의 음악, 내 안에 인영이가 있다는 김동원의 말은 마지막 세 번째 에피소드를 재활용 영화처럼 보이게 한다. 이 영화의 반전은 배우(특히 김태우)의 연기까지 우스워보이게 만든다. 이 에피소드에서 인상적인 것은 그림자 없는 인영의 모습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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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은 낭만적이고 나른하며 음울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그때 우리는 모든 것이 영원할 줄 알았다는 대사로 마무리되는데, 병원-구체제-구시대가 종말을 앞둔 마당에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꿈꾸었다니 허망하지 않은가? 영화도 전체적으로, 아름답지만 뭔가 공허하고 부유하는 듯한 분위기를 은근히 풍기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담>은 구세대에 대한 비판으로,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작품이다. 1942년, 즉 일제 말기가 시대 배경으로 선택된 것은 그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정남이 안생병원이 헐린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갈 때 계단을 보면 죽은 까치가 뒹굴고 있는데, 나중에 정남의 스케치북을 보면 까치 그림이 있다. 그러니 그 죽은 까치는 말할 것도 없이 정남 자신을 상징하는 것. 생각해 보면 영화 첫 부분에서 정남의 나레이션도 그가 죽은 후에 (아마도) 귀신이 되어 자신이 죽은 날을 회상하는 것일 텐데, 이 영화의 은근함은 이런 점에서도 빛난다.

추신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정남의 뒷모습이 빛에 왜곡되어 기묘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이 장면에서 마치 머리가 줄어든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 또한 달팽이 이미지의 변형. 글을 쓰면서 앞머리에 올린 포스터는 티저 포스터로 알고 있는데, 달팽이 이미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어서 본 포스터 대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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