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순응자]를 봤다. 전에 시네마테크에서 봤을 때나 부산에서 봤을 때는 모두 중간에 졸아서 제대로 보지 못했다. 처음 보는 영화는 무조건 좋은 컨디션에서 봐야 한다는 모 평론가의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말이다. 지금까지 본 베르톨루치 영화들은 [1900년],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마지막 사랑] 이 정도인데 이 중에서 그래도 가장 낫다고 느낀 것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였고, [순응자]는 그보다 더 괜찮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본지 한참 후에 영화평론가로 활동하시는 모 선생님께 왜 [순응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여쭤봤더니 영화가 너무 장식적이라, 싫어하는 게 이해는 간다고 말씀하시더라. 물론 그분은 강의 시간에 [순응자]의 한 장면을 보여주실 정도였으니까 이 영화를 싫어하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나중에 [순응자]와 베르톨루치에 관한 에피소드를 더 말씀해 주셨는데, 베르톨루치는 부르주아 집안에가다 아버지가 유명한 시인, 그리고 코스모폴리탄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는 항상 유명한 문인들이나 예술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베르톨루치는 18세 때 시를 써서 어디서 큰 상을 받았는데 도저히 아버지만큼 잘 쓸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화로 진로를 틀었고, 그때 가깝게 된 사람이 고다르와 파졸리니. 파졸리니의 장편 데뷔작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주위의 천재들, 특히 고다르에 대한 열패감 속에서 만들어 낸 영화가 [순응자]이며 이 영화에서 암살당하는 콰드리 교수가 바로 고다르라는 것이다(콰드리 교수의 집주소, 아내의 이름 등등). 재미있는 애기를 몇 가지 더 들었는데 안나 역으로 출연하는 도미니크 산다가 영화에 처음 등장할 때 걸어오는 모습은 마를렌 디트리히의 인용이며 그의 영화엔 그렇게 영화광스러운 장면이 많다는 이야기. 강의 시간에 보여준 것은 후반부에 카페에서 군무가 펼쳐지는 장면이었다. 카메라 워크를 통해 마르첼로가 '덫에 걸린 인간'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영화의 결말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은 마르첼로가 파멸했다는 것인데, 여러 가지 면에서 그것이 내적인 파멸임에는 분명하지만 어쨌든 사회적인 인간으로서는 그렇게 가까운 사람들까지 배신하면서 그럭저럭 살아남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어쩐지 [순응자]와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해방 후의 우리나라에 대입시켜서 보게 된다.
Posted by Wolverine

블로그 이미지
편하게 생각하자.
Wolverine

공지사항

Yesterday204
Today45
Total902,233

달력

 « |  » 2018.08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