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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12/19 자치통감 2
자치통감 2 (한나라 중기 편)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푸른역사, 2002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부터 권28을 번역한 책이다. 시간적으로 효무제(孝武帝) 원삭(元朔) 5년(기원전 124년)부터 원제(元帝) 영광(永光) 2년(기원전 42년)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에는 흉노와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한나라의 대규모 군사 작전의 영향과 내부 분열 등으로 무제 이후 흉노는 약화되었다.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 많은 돈을 들였는데, 전쟁 때문에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황제는 흰 사슴의 가죽으로 피폐(皮幣)란 것을 만들었는데 한 개에 40만 전으로 하고 왕후나 종실에 속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쓰도록 만들었다. 무제는 흉노뿐만 아니라 조선, 남월, 서역 등을 공격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무제 집권 말기에는 무고(巫蠱) 사건이 벌어진다. 황제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누명을 쓰게 된 위태자(衛太子)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궁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결국 태자는 도망갔다가 자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태자와 관료들의 갈등이 있었고, 무제는 태자가 죽은 뒤에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깨닫고 후회했다.
무제는 어린 아들 유불능(劉弗陵)을 태자로 세우면서 황제의 생모인 구과부인(鉤戈夫人)을 죽였다. 임금이 나이가 어리고 어머니가 권력을 휘두르면 여후 때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무제는 금일제(金日濟, 흉노 출신), 곽광(霍光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의 이복동생), 상관걸(上官桀) 등에게 태자를 돌보게 했는데, 태자는 즉위하여 소제(昭帝)가 되었다. 금일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곽광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차츰 밀려나게 된 상관걸은 역모를 꾀하다가 실패하였다. 소제는 현명한 황제였으나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없는 소제 대신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이 즉위했다가 불과 27일 만에 쫓겨나고 만다. 그 후에 나라를 물려받은 사람은 죽은 위태자의 손자인 유병기(劉病己, 나중에 백성들이 기휘하기 편하게 어려운 이름으로 바꿈)로, 그는 즉위하여 선제(宣帝)가 된다. 선제는 젊은 시절을 궁이 아닌 민간에서 보냈으며 백성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다. 곽광의 부인 곽현(霍顯)은 작은딸을 왕후로 만들기 위해 황후를 독살했고, 곽광이 죽은 후에 곽 씨 일족은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멸족되었다.
선제는 내치와 외치에 성공한 황제였고 명신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간혹 훌륭한 신하들을 버리는 일이 있었다. 선제는 법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였는데 태자가 유학에 의한 통치를 중시하는 것을 보고 태자가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내심 다른 태자를 세우고 싶었으나 태자가 자신이 서민이었던 시절에 생긴 자식이며 독살당한 황후가 낳은 아들이라 바꾸지 못했다. 선제의 말대로 태자는 유약하여 홍공(弘恭)이나 석현(石顯) 같은 간신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하는 인상 깊거나 재미있는 대목들.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과 표기장군 곽거병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뛰어난 장군들이었으며, 곽거병은 위청의 생질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치통감에는 위청 때문에 자살한 이광(李廣)의 아들 이감(李敢)이 위청에게 부상을 입히자 얼마 후에 곽거병이 이감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둘의 성격은 서로 반대였다. 자치통감은 위청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선비를 좋아한 반면 곽거병은 젊어서부터 귀하게 되어 사졸들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았다고 전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혹리열전(酷吏列傳)이 있고, 자치통감에도 혹리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에게 족쇄를 풀어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그러고는 그날로 400여 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서 보고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군에 사는 사람들은 춥지도 않은데 벌벌 떨었다. (p.70)
확실히 지금보다는 사람들의 목숨값이 훨씬 가벼운 시대였다. 요사스런 말을 퍼뜨리는 것, 혹은 전쟁에 지는 것도 죽을 죄였다. 자치통감 군데군데 전쟁에 지고 돌아온 장군들이 사형을 당하는 대신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죄목으로 죽은 신하들이 많다.
무제 원수 6년(기원전 117년) 반순복비(反脣腹誹)의 죄가 생겼다. 입술을 삐쭉 내미는 죄라는 뜻으로, 조정에서 불편한 것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비방하는 것도 죄가 되었다는 말이다. 반순복비의 죄가 생기면서 공경과 대부들은 대부분 아부만 하면서 보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나라에서 조선을 공격했을 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서로 반목했는데, 순체가 사신으로 온 공손수(公孫遂)의 도움을 받아 양복을 체포한 뒤 끝내 조선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순체는 서로 공을 다투고 질투하여 계획을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으며, 양복은 돈을 내고 속죄를 받아 서인이 되었다. 공손수가 돌아가서 처형된 것을 보면 무제는 순체의 죄가 더 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제는 이릉(李陵)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지고 항복한 뒤에 그를 변호한 사마천을 거세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릉을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릉이 흉노에 있을 때 이릉의 가족들이 헛소문 때문에 모두 죽임을 당했으므로 이릉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반면 흉노에 억류된 소무(蘇武)는 오랜 세월 동안 고초를 겪다 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릉과 소무가 헤어지는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 하나다.
무제 때부터 무리를 지어 횡행하는 군도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만큼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다는 반증.
소제가 죽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무제의 아들로 황제의 자리를 이어야 했는데, 그때 살아 있던 무제의 아들은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릉왕은 본래 하는 짓이 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결국 황제가 되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광릉왕은 음탕하고 힘이 셌는데, 한번은 곰과 싸우다 물려 죽을 뻔 했다고 한다. 곰과 싸우는 건 황제로서의 결격 사유인가.
창읍왕은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곽광 등에 의해 쫓겨났다. 낭중령인 공수(龔遂)는 창읍왕이 황제가 되기 전에 충직한 말을 많이 했다.
낭중령인 산양 사람 공수는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강직하였다. 또한 절개가 높아 안으로는 창읍왕에게 간언을 했으며, 밖으로는 창읍왕의 사부와 재상에게 책임을 이야기하였는데, 경전의 뜻을 인용하고 화와 복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부하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아 창읍왕인 유하의 허물을 면전에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창읍왕은 일어서서 귀를 막고 달아나면서 말했다.
“낭중령은 욕쟁이야!” (p.304)
창읍왕은 귀여운 사람이다. 그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사악한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궁중의 법도나 예의를 전혀 지키지 않았던 탓이다. 난잡하고 음란하다고나 할까. 그는 관원이나 관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다거나 황제의 시신이 떠나지도 않았는데 연회를 연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
이에 승상과 어사는, 하후승(夏侯勝)이 조서를 비난하는 의논을 하고 먼저 돌아가신 황제를 훼손하여 무도하다고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그런데 승상부의 장사(長史)인 황패(黃覇)가 하후승을 비호하자 두 사람 모두 하옥되었다. (중략)
한편 하후승과 황패가 오래 갇혀 있게 되자 황패가 하후승에게 <상서>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후승은 죄를 지었으므로 곧 죽을 것이라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에 황패가 말했다.
“아침에 도에 관한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후승은 그 말이 현명하다고 여기고 드디어 그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옥에 갇혀서 두 번 겨울이 지나는 동안 그의 강론은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았다. (p.332)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다른 장면을 꼽으라면 능신이었으나 교활하고 부도한 죄로 처형된 좌풍익(左馮翊) 한연수(韓延壽)가 처형되기 전 백성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고르겠다.
광천왕(廣川王)인 유거(劉去)가 그 스승과 희첩 10여 명을 죽이는 데 연루되었다. 그는 심지어 납이나 주석을 녹여 입에다 들이붓거나 지체(肢體)를 해한 뒤 독약을 넣고 이를 끓여 그 시체를 없애버렸다. 그를 폐위시켜 상용(上庸, 호북성 죽산현)으로 추방하였더니 자살하였다. (p.344)
이건 아마 역사상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
삼성은 백호(白虎)를 말한다. 세 별이 곧게 늘어서 있는데 이것이 형석(衡石)이며, 아래로 세 별이 날카롭게 늘어서 있는데 이것을 벌(罰)이라고 한다. 여기에 패성이 나타나면 병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p.548)
548페이지의 각주에 나와 있는 설명이다. 삼성이란 건 오리온자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패성은 어떤 별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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