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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08/02/05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상영작 단평 by Wolverine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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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 (The Chaser, 2008)

감독 : 나홍진
출연 : 김윤석, 하정우, 서영희, 김유정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꼽으라면 저는 엄중호가 지영민의 누나네 집을 찾아가는 장면을 들고 싶습니다. 엄중호는 지영민의 누나에게 아주머니 동생이 우리 아가씨들을 팔아 치웠는데 그동안 자기가 그 아가씨들에게 빌려준 돈을 다 어떻게 할 것이냐, 각서를 쓰자고 하죠. 그때 지영민의 어린 조카가 나타납니다. 그 아이는 머리를 다쳐서 백치가 된 것으로 보이며, 그건 지영민이 한 짓이었습니다. 이때가 영화의 전환점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엄중호는 미친 척 하는 것이라며 지영민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고, 미진을 찾으러 다닌 것도 돈 때문이었습니다. 지영민이 자기 조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인지 보고 나서야 엄중호는 그가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그 순간은 엄중호는 물론 관객들이 지영민에게 진정으로 분노하게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들은 엄중호가 미진의 딸인 은지의 친아버지라고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렇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편의점에서 은지에게 컵라면을 사주면서 둘이 이야기를 할 때도, 아버지가 왜 없는지에 대해 은지에게 허술하게 둘러댄 미진에 대해 엄중호가 한심함을 느꼈다는 것 이상은 알 수 없습니다. 엄중호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한 은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을 때 간호사가 은지 아버님 되시죠, 라고 물으며 보호자 사인을 부탁하는데, 그때 사인을 해 주는 엄중호는 마치 내가 아버지는 아니지만 사인을 해야 되지 않겠느냐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엄중호가 미진과 그의 딸 은지에게 느끼는 감정은 자신이 여자들을 잃어버리면서 입은 막대한 손해와 성질머리가 뾰족한 아이에 대한 짜증에서 동정심과 연민, 죄책감으로 급격히 나아가며 그런 감정은 점차 증폭되는 것 같은데, 엄중호의 감정이 변화를 일으키는 기점에는 그가 지영민의 조카와 마주친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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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홍진 감독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지만, 해석의 자유를 믿는 한 관객으로서 감히 이야기하자면 어떤 면에서 <추격자>는 <살인의 추억>에 대한 응답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살인의 추억>의 그, 미칠 듯이 범인을 잡고 싶었지만 끝내 잡을 수 없었던 안타까움을 참을 수 없었던 나홍진 감독은 한발 더 나아가 연쇄살인마를 응징하는 이야기를 만든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결국 미진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죄책감이나 안타까움은 그대로 남습니다. 그건 온전히 <살인의 추억>의 정서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추격자>에서는 <공공의 적>의 정서가 느껴지기도 하는데, <공공의 적>의 조규환은 부모도 무참히 죽이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살인마이며 잃어버릴 것도, 지켜야 할 것도 없는 강철중은 조규환을 붙잡아서 반드시 벌해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를 불태웁니다. 그렇게 보면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이 차를 몰고 가면서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장면은 <추격자>에서 엄중호가 차를 몰고 가며 지영민 누나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약간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의 인터뷰에서 나홍진 감독은, 그 x끼들(연쇄살인범들)은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추격자>의 지영민은 정상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은 아니며, 설령 그에게 어떤 인간적인 동기가 있다고 해도 감독은 관객들이 그걸 볼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거기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영민이라는 캐릭터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그의 야수성입니다. 그것이 영화에서 최초로 드러나는 건 미진이 그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인데, 전의 집주인이 키우던 개가 달려오자 지영민은 으르렁 짖으며 달려들어서 쫓아냅니다. 지영민의 성격을 살짝 암시하고 본격적인 것은 집안에 들어가서 보여주기로 했는지, 멀리서 찍은 이 장면은 아주 짤막하게 처리되고 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지영민이 초콜릿을 맛있게, 유달리 집착하듯이 먹는 장면이나, 마치 피 냄새는 잘 맡을 줄 안다는 듯 여형사가 생리 중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그렇습니다. 하정우는 지영민 역을 맡아 가장 저차원적인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영민이 경찰에게 자신의 범행을 밝힌 데에는 살인을 자랑하고 싶은 어린아이 같은 충동, 그리고 남의 차를 훔쳐 탔다는 사실이 들통 나고 포주에게 잡힌 난감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공작(이미 몇 번 살인범이라고 주장했다가 풀려난 전력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 처하면 모든 것이 무마될 수도 있을 거라는 계산)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러면서도 지영민은 교활하게 자신이 지금 어디에 살고 있는지, 사람들을 죽여서 어디에 묻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결정적인 사항이니까요. 영화에서는 지영민이 전에 따라다니던 여성, 그리고 마치 범죄 심리학자 같이 보이는 인물과의 경찰서에서의 대화를 통해 지영민이 성불구자이기 때문에 범행을 저지르게 된 것처럼 설명하지만, 제가 보기엔 성불구만으로는 그의 범행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의 범죄가 욕구불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섹스를 대신하여 여자의 머리에 정을 박았다고 보기엔 그의 인간성이 너무나 저차원적이고 어둡습니다. 행동거지까지 짐승을 닮아 있는데요? 게다가 지영민이 죽인 미진의 머리와 팔을 잘라 수족관에 넣는 것은 뭔가요? 그것도 성적인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지영민이 하필이면 조카에게 그런 짓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실험? 연습? 원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영민이 어린 조카를 성적 대상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지영민이 취조를 받다가 범죄 심리학자 같은 인물에게 네가 뭘 아느냐고 달려들었을 때 지영민의 말처럼 그의 범죄, 그의 내면에 뭔가가 더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평범한 사람들은 이해할 수도 없고, 어쩌면 알아서도 안 될 그런 것인지도 모르죠. 물론 그런 걸 보여주자는 게 감독의 의도는 아니라서, 이 장면은 기수대장(?)이 브라보를 외치며 박수를 치는 것으로 신속하게 마무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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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목표는 인류 최고의 악질인 지영민을 잡아 단죄하는 것, 동시에 흉악한 범죄자를 잡지도, 그렇다고 피해자가 생기는 걸 막지도 못하는 부조리한 사회와 시스템에 대해 짜증을 토해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무래도 영화의 후반부는 지영민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만들어졌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지영민이 슈퍼에서 살인을 저지른 이후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한솥밥을 먹은 식구이며 심정적으로는 동정이 가는 면이 있다고 해도 경찰을 여러 명 구타하고 경찰차를 꼬라박게 만든 엄중호가 그렇게 쉽게 나와서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처음에 지영민에게 유인되어 그의 집으로 끌려들어가 죽은 교회 권사의 집에 엄중호가 들어가는 장면도 있는데 그 뒤를 보면 이전에 엄중호를 만났던 권사네 집 아주머니가 전경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엄중호가 설마 전경을 데리고 다니는 것은 아닐 테지요? 전직 형사에 불과한 엄중호가 범죄 현장에 엄연히 들어가 있는 것도 그렇고, 피칠갑이 된 범죄 현장에 멀뚱히 앉아 있는 엄중호를 무심히 보고 지나가는 남자의 존재는 어떻습니까?
관객들은 분명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처럼 끝나는 영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므로, 흥행 면에서 보면 지영민이 슈퍼에서 빠져나간 이후부터 그를 잡기까지의 과정이 들어가는 편이 나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영화는 엄중호가 울부짖는 장면에서 끝나야 했던 것 아니었을까요? 미진이 엄중호에게 걸었던 전화도, 그게 무슨 내용이었는지 알려주지 않았어야 되는 것 아닌지. 만약에 엄중호가 망원동 골목을 헤매다 도망가는 지영민과 마주쳐서 그를 잡고 범행 현장인 슈퍼에서 울부짖는 것으로 마무리한다면 어땠을까요? 물론 그렇게 영화를 만들 사람은 없을 테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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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다시 보니 전에 좀 이상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멀쩡해 보이고, 대신 새로 어색해 보이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가령 처음에는 지영민 집의 열쇠는 엄중호가 갖고 있었는데 지영민이 슈퍼에서 범죄를 저지른 뒤에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가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가만히 보면 미진이 집에서 뛰쳐나올 때 문에서 덜컹 소리가 나는 것이 들립니다. 그때 문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족관에 있는 미진의 머리도, 처음 볼 때는 다른 사람의 머리 아니었을까 생각을 했는데 다시 보니 확실히 미진의 머리가 맞더군요. 그런데 수족관에는 미진의 팔까지 들어있었으니 지영민은 그 짧은 시간에 변변한 도구도 없이 사람의 목과 팔을 해체할 수 있는, 솜씨가 아주 좋은 백정인 셈입니다. 형사 둘이 지영민을 미행하는 장면에서는 남자 형사 한명이 지하철에서 지영민을 놓치는데, 그 남자 형사는 지영민을 범행 현장까지 호송하려던 형사입니다. 그때 판사에게 걸려서 지영민이 풀려나게 됐지요. 그러니 지영민 입장에서는 둘 다 아는 얼굴이었던 셈입니다. 미행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말이 안 되는 설정이지만 굳이 오형사(그 여형사)가 등장해야만 했다면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범행 현장 바깥에서 오형사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장면은 슬펐습니다.
엄중호는 모텔에서 지영민과 아는 여자를 만나고 그 여자의 입을 통해서 은지는 엄마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그때는 비가 많이 내렸고 승용차 창문도 꽉 닫혀 있었는데 밖에서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를 차 안에서 잘 들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바로 옆에서 말한 것도 아니어서 거리가 꽤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주는 정서적인 힘이 있기에, 좀 어색하지만 넘어갈 수도 있는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은지가 오토바이에 치이는 것은 새벽이었는데, 오토바이에 치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기 힘들도록 찍었더군요. 그런데 음식점 근무 시스템을 잘 모르지만 새벽 주택가로 배달부들이 그릇을 수거하러 다니나요? 게다가 그릇에는 음식점 이름이 버젓이 남아있을 텐데 아무리 급하게 도망가기로소니 그걸 그대로 다 남겨두고 가다니? 인적이 드문 새벽이라면 배달부도 좀 더 침착해지지 않았을까요? 이건 사소한 건데, 영화 초반부에 모텔로 들어간 여자가 섹스를 하면서 비디오를 찍으려던 손님에게 맞았을 때, 분명히 비디오카메라를 든 남자가 화장실에 숨어 있었죠. 그런데 모텔 종업원들이 그 손님을 말릴 때도, 엄중호가 그 손님을 혼낼 때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원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는 게 보통인가요?
배우들에 대해서 짤막하게 이야기하자면, 김윤석의 어조라든지 발음 같은 것은 어딘지 모르게 송강호와 닮은 데가 있더군요. 그런 점 때문에 <추격자>를 <살인의 추억>과 떼어서 보기가 더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점을 빼면 김윤석의 연기는 정말 좋았죠. 하정우의 무심한 인간 야수 연기도 그렇고. 김윤석이 나온 장면 중에서, 엄중호가 병원으로 돌아오는데 절뚝거리는 그를 보고 시장과 비서들이 황급히 달아나는 장면은 정말 좋았습니다. 오버하지 않고 제대로 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머지 배우들 중에 파출소에서 웃통 벗고 난리치는 나이 든 형사는 어디선가 많이 본, 꽤 유명한 배우인 것 같은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엄중호 보고 너 진짜 형사냐고 꺼지라고 하는 보도방 남자 역을 맡은 배우는 진중권을 닮았죠? 키도 컸습니다. 나중에 혹시, 아주 혹시 황우석 영화가 나오면 꼭 진중권 역을 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슈퍼 아주머니 때문에 객석에서 아주 우렁찬 한숨과 탄식이 울려 퍼졌는데, 가만히 보면 그 아주머니도 입으로는 안심된다고 말을 하면서도 뭔가 불안했던 것 같아요. 그러니 사람을 함부로 믿으면 안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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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는 남성 성기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그 말이 두 번이나 나오는데, 언제부터 이 말이 영화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쓰일 수 있게 된 건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그게 싫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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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읽은 책들 2008/02/11 18:29

아마데우스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범우사, 1993

<아마데우스>를 보다가 예전에 장정일이 <독서일기>에서 언급했던 구절을 찾아냈다.

모차르트  음악적인 것은 제외하고죠! (그는 흥분하여 앉는다) 화내시니 말고 말씀해보세요. 왜 이탈리아 인들은 음악의 복합성을 겁내는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단출한 마음씨의 사람들이지요. 강직하고 지배적이고, 또 강직하고 지배적이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서 부활할 때까지! 그런데 인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엔 싫증이 난단 말입니다. 주인공은 열정적이고, 여주인공은 순진하고. 늙은이는 수전노. 가정교사는 음흉하고, 사소한 모순도 없다 이 말입니다!......
난 진짜 인간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사실적인 장소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부인의 내실! 나에게는 부인의 내실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흥분을 주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마루에 흩어진 내복-여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슈미즈-잠자리 밑엔 넘칠 정도로 차 있는 요강! (pp.155-156)

살리에리  (관객에게) 그리하여 <돈 조반니>에서는 부친의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나의 <다나이우스> 오페라보다도 더욱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난 거죠. 거기에다 지옥으로 던져질 '죄많은 방탕아'의 모습이 또 나타난 거구요!

실루엣이 사라진다. 모차르트가 마루 위에 남아 있다. 하인들이 안락의자를 치운다.

나는 그가 일상 생활 속에서 그의 예술을 창조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그도 저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죠. 그러나 그는 평범함에서 비범한 전설을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난 전설에서 고작 평범한 작품을 창조했을 뿐이었죠!...... 그가 <돈 조반니>를 무대에 올렸는데, 나는 또 하나의 하찮을 골동품을 무대에 올렸답니다. <오르무르의 왕 악수르>를 말입니다. (p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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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3

읽은 책들 2008/02/11 17:47

자치통감 3 (한나라 말기)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푸른역사, 2002

 
일찌기 제갈량은 출사표를 통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기에 전한이 흥성했으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했기에 후한이 몰락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한 말기의 정치를 보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신 석현(石顯)의 세력은 성제가 즉위하면서 소탕되었지만 성제(成帝)는 외척인 왕씨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다. 왕씨의 우두머리인 왕봉(王鳳)은 두흠(杜欽)을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기도 했고 왕씨 가문에서는 간혹 강직하고 훌륭한 인사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왕봉은 정적인 왕상(王常)이나 왕장(王章) 같은 인물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황제도 눈살을 찌푸릴만한 심한 사치를 누렸고, 성제 자신은 후에 여색에 빠져 황후를 폐위하고 조비연(趙飛燕)을 대신 황후로 삼기에 이르렀다. 또한 성제 치하에서는 외척뿐 아니라 순우장(淳于長) 같은 간신들이 등장하게 된다. 애제 시대에는 왕씨의 세력이 쇠퇴하였으나 부태후(傅太后)를 중심으로 한 애제의 외척들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은 동현 등이 권세를 떨쳤다. 황하에서는 수재가 되풀이되었으며 한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다. 간간이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민심이 조금씩 이반했던 것 같다. 왕망(王莽)은 이때 등장했다.
성제와 애제(哀帝) 곁에는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있었고 왕도 외척들의 권력 독점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끝내 외척이나 권신들을 저버리지 못했다. 이 무렵 눈에 띄는 것은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의 우유부단함인데, 외척이나 총신을 감싸고 잘못이 있어도 확실하게 내치지 못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효성황제 시절에 정권이 왕씨의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던 황제(애제 : 글쓴이 주)는 즉위하자 대신들을 죽이면서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고, 무제와 선제를 본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믿었으며,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대업은 이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p.374)

왕망은 성제의 외척인 왕씨 집안 출신으로 왕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는 다르게 인망이 있었다. 왕망은 자신을 낮추고 관직에 임용된 뒤에는 강직한 정치를 펼쳐 인심을 얻었지만 자치통감에서는 왕망이 인심을 얻기 위해 교활한 처세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애제가 붕어한 뒤 태후인 왕정군(王政君)을 등에 업고 집권한 왕망은 외척 세력과 조정에 있던 간신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는데, 그 뒤로 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저항이 없다. 이건 정말 미스테리다. 그나마 바깥에서 왕망에 저항하는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나긴 했으나 너무나 쉽게 제압되었고, 조정 안에서는 왕망에 반대하는 움직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왕망의 독단적인 정치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사직하는 등 소극적인 처신으로 일관했고, 그나마 왕망의 아들인 왕우(王宇)가 일으킨 여관(呂寬)의 사건 같은 것도 어떤 움직임이라고 보기엔 힘들 것 같다. 밖에서 반란이 거의 벌어지지지 않은 것은 유씨 성 가진 제후들의 세력이 계속해서 쇠퇴해 왔기 때문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겠지만 안에서 이토록 저항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치통감> 3권에서는 왕망이 황제로 등극한 후 벌어진 실정과 적미(赤眉)의 봉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등장을 서술하는데 왕망이 세운 신의 실패를 보면

1. 대외 정책의 실패(사이四夷들이 왕을 칭하는 게 고대의 제도에 위배된다는 뜻에서 흉노의 인수를 왕공의 도장에 넣는 새璽 대신에 제후의 도장에 넣는 장章을 새긴 도장으로 바꿔 주었는데 이는 "선우의 인새와 다른 신하의 것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pp.480-481)다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신에서는 흉노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신은 고구려와도 마찰을 일으켰으며 다른 민족들의 반란도 이어졌다)
2. 경제 정책의 실패(한대에 유통되던 오수전 대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키려 했으며 화폐 제도의 혼란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는 물가안정책인 오균五均과 전매제도인 육관六筦 같은 제도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 제도의 미비 혹은 잦은 교체(여러 군이나 봉국에 소속된 관할 구역을 다시 나누고, 없애거나 새로 설치하거나 바꾸어서 천하에는 일이 많아졌고 관리들조차 고쳐진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다. p.423 또 제도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여 명령이 매우 번잡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을 시행하려고 할 때 번번이 물어서 일을 처리하였는데, 이런 일이 앞뒤로 계속 이어져서 한 가지 일을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다음 일을 벌이는 식이었다. 왕망은 항상 새벽이 되도록 등불을 켜고 나라 일을 돌보았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p.529 혹은 왕망이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위로는 공후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리까지 모두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왕망의 제도가 번잡스러운 것이 이와 같아서 세금을 부과하지만 계산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수가 없었고, 관리들은 끝내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관직을 통하여 부정한 행위를 하고 뇌물을 받아서 스스로 생활하였다. pp.530-531)
4. 유능한 신하들을 믿지 못하여 처형하거나 면직시킨 사례가 극히 많고, 기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
5. 후에 신선을 믿게 되면서 큰 공사가 빈번히 발생하여 국가 재정을 좀먹음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왕망 정치의 실패는 유가적 이상주의의 실패로 보인다.
"왕망은 속으로 제도가 정해지면 천하는 자연히 태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리를 깊이 생각하며, 예의를 제정하고, 성악(聖樂)을 만들며, 육경(六經)에 합당한 이론들을 강구하였다. 공경들은 해 뜨면 입궁했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몇 년을 논의해도 결정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송 등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령이 빈 자리가 되어 몇 년이 지나도 태수가 여전히 겸직하고 있으니 탐욕스럽고 잔학한 짓이 날로 심해졌다."(p.528)


봄, 정월에 흉노인 호한야선우가 장안에 와서 입조하며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한나라와 친해지기를 원하였다. 이에 황제는 후궁 가운데 양가자(良家子)인 왕장(王嬙),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내려주었다. 선우는 환영하며 즐거워하였다.(p.57)
솔직히 이제까지는 왕소군을 전설속의 인물로만 생각했다. <자치통감>에는 왕소군의 아들이 나중에 흉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황상이 미행을 하다가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노래하고 무용하는 조비연(趙飛燕)을 보고 반하여 궁궐로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 후로 조비연은 크게 총애를 받았다. 조비연에게 여동생이 있어 이를 다시 불러들이니, 자태와 성품이 더욱 농염하고 순수하여 좌우에서 모두 쉬지않고 감탄하였다.(p.161)
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출 수 있었다던 그 조비연. 조비연의 행실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애제 사후 정권을 잡은 왕망에 의해 폐위되자 자살하였다.

부마도위(駙馬都尉) 겸 시중인 운양(섬서성 순화현) 사람 동현(董賢)은 황상에게 총애를 받아서 황상이 나갈 때에는 참승(參乘) 하였으며, 들어와서는 황제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상으로 받은 재물이 거만(鉅萬)이나 되었고, 그 귀함은 조정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항상 황상과 더불어 잠자고 일어났다.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옆에 있는 황상의 옷소매를 베고 잠이 들었다. 황상이 깨어 일어나려 해는데 동현이 잠에서 깨지 않자 동현을 깨우고 싶지가 않아서 마침내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p.323)
이 일 때문에 동성간의 애정을 나타내는 단수지벽(斷袖之癖)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성제 시대의 부평후(富平候) 장방(張放)은 황제와 잦은 연회를 벌여 간신으로 지탄을 받았는데 황제가 붕어하자 곡하다가 죽었다. 이에 대한 평가. "장방이 황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충성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충성심이 없으니, 어짊을 해친 사람입니다."(p.259)

같은 달에 전휘광(前煇光, 장안시 남부) 사람인 사효(謝囂)가 무공(武功, 섬서성 무공현)의 현장인 맹통(孟通)이라는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하얀 돌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위는 둥그렇고 아래는 네모로 되어 있으며 붉은색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다고 상주하였다. 그 글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고 씌어 있었다.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징표를 주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p.431)

또 유자라고 하였던 유영(劉嬰)의 유모에게는 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항상 사방이 벽면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육축(六畜)의 이름조차 모르게 하였다.(p.465)
왕망이 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유영에게 한 짓을 보면 여후가 척부인을 인간 돼지로 만든 것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인다.

적의(翟義)의 일당인 왕손경(王孫慶)이 체포되었다. 왕망은 태의(太醫)와 상방(尙方, 주방 담당자), 그리고 기술 좋은 백정들을 시켜서 그의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겨서 오장을 꺼내게 하였다. 그런 뒤 대나무를 가늘게 만들어 그의 혈관을 따라가면서 처음과 끝나는 곳을 알아보고는 병을 고친다고 하였다.(p.534)
그러나 이런 기록을 보면 왕망의 잔혹함에 대한 <자치통감>의 기록은 과연 믿을만한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서 인간의 혈관과 그 역할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또 특이한 기술을 갖고 있어서 흉노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널리 모집하면서, 보통의 순서와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니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수가 1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어떤 이는 물을 건너는 데 배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말들의 머리와 꼬리를 잇게 해서 100만 명의 군사를 호송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또 어떤 이는 한 말의 양식을 갖고 가지 않아도 약물만 먹으면 군대 전체가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하루에 1,000리를 날아갈 수 있어서 흉노를 정탐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왕망이 이 사람의 재능을 시험해보았더니, 큰 새의 깃털을 가지고 두 개의 날개를 만들어서 머리와 몸에 붙이고 고리와 끈으로 조종하는데, 수백 걸음을 날아가다가 떨어졌다.(p.544)

이건 아마 인류 최초의 비행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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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lverine

수라 (修羅, Pandemonium, 1971)

감독 : 마츠모토 토시오
출연 : 나카무라 가츠오, 산조 야스코, 카라 주로

<수라>는 드물게 만날 수 있는 강렬한 비극으로, 이 영화는 일본판 <햄릿>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정성일 씨의 설명에 따르면 <주신구라>와 <토카이도 요츠야 괴담>을 합쳐 놓은(그러나 이러한 설명이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는 주군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집단적인 의지에 종속된 한 우유부단한 사무라이가 몰락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종종 한 컷을 여러 번 반복해서 보여주는 촬영은 그의 우유부단함은 물론 피하고 싶은 극한 순간까지 잡아 채서 보여준다. 이 영화의 흑백 화면은 어둠과 암흑 그 자체이다. 그리고 주인공인 겐고베가 칼질을 할 때마다 흩뿌려지는 피의 질감은 시뻘건 피보다 더 끈적거린다.
게이샤 코만이 겐고베에게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표식이라고 보여주는 맹세의 고다이리키는 그의 진짜 남편인 산고로가 몇 글자를 더 새기자 '산고로 사랑'이 되어 버리는데, 이 번역은 아주 재미있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우스운 장면들은 겐고베의 상상 장면에서 나타나는데, 그런 요소들 조차 겐고베 개인의 모순을 드러낸다.

악질 경찰 (Bad Lieutenant, 1992)

감독 : 아벨 페라라
출연 : 하비 케이틀, 프랭키 쏜, 빅터 아르고

오승욱 감독의 말처럼 <악질 경찰>은 일년에 하루 쯤, 그동안 지은 죄를 뉘우치고 싶은 날에 보면 좋을 영화다. 마약과 도박에 쩔어 있고, 운전면허증도 없이 아빠 차 몰고 나온 여자애들 협박해서 그 앞에서 자위나 하는 막장 형사의 인생은 뉴욕 메츠가 월드시리즈 3연패 뒤 기적같이 LA 다저스를 한 게임, 한 게임씩 꺾어가면서 종말로 치닫는다. 형사가 마약 딜러에게 무슨 돈인지 3만 달러를 받고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장면은 그의 두려움과 고통을 너무 실감나게 전달해 주고, 범인들을 보낸 후 울면서 걸어가는 그의 뒷 모습을 묵묵히 보여주는 데에 이르게 되면 그 숭고함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악질 경찰>의 형사는 사람이 왜 이렇게 살까 한숨을 쉬게 만드는 사람이지만, 그의 행보를 통해서 인생에 대한 한가닥 희망의 끈을 남겨준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형사가 과연 구원받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데, 이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다.
이 영화에서 마약을 하는 장면은 거의 리얼타임이었다고 들었다. 반대로 멜빌의 영화에서는 옷을 갈아입는 장면이 리얼타임으로 나온다. 그리고 대사가 좋다. 극중 마약 중독자로 나오는 조 타멀리스가 말하길, "흡혈귀는 좋겠어. 남의 피를 빨아먹으니까. 우린 우리의 살을 씹어먹어야 해."

퓨너럴 (The Funeral, 1996)

감독 : 아벨 페라라
출연 : 크리스토퍼 워큰, 크리스 펜, 빈센트 갈로, 아나벨라 시오라, 베니치오 델 토로, 이자벨라 로셀리니

쟁쟁한 배우가 워낙 많이 나오는 영화지만 그 중에서도 눈에 뜨이는 것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둘째 체자리노 역으로 나오는 크리스 펜. 저렇게 대단한 배우가 있었나? 자신의 타고난 폭력 성향을 억누르는 크리스 펜의 연기나 'Tonight will be the night'을 열창하는 크리스 펜의 모습은 머릿속에서 지우기 힘들다. 그러나 이해하기 쉬운 영화는 아니었다. 오승욱 감독의 평에 따르면 이 영화가 <대부>보다 낫다는데, 나는 <대부>를 보지 못했으므로, 그리고 이 영화를 다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판단은 보류.

복수의 립스틱 (Ms.45, 1981)

감독 : 아벨 페라라
출연 : 조 타멀리스, 알버트 신키스, 달린 스투토

뉴욕에서 재단사로 일하고 있는 데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여성으로 퇴근길에 괴한에게 강간을 당하고 간신히 집으로 돌아가지만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강도가 그녀를 강간하려 한다. 강도를 다리미로 때려 죽인 데나는 분노와 공포를 이기지 못한 나머지 남자가 갖고 있던 총을 들고 복수를 한다. 이 복수는 백인 사진작가, 흑인 남성(빚쟁이? 포주?), 사우디 아라비아 사업가, 애인과 히히덕거리는 동양인 청년(실패!) 등 인종과 계급을 가리지 않고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할로윈 파티장에서의 학살극으로 마무리된다. 어둡고 공포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황당한 아이디어와 활력이 넘치는 영화인데, 이제까지 총도 한번 안 잡아본 것 같은 데나가 갑자기 명사수로 변하고, 또 암시장이라도 알고 있었는지 총알도 어디선가 잘도 구해온다. 갱들은 쌍절곤을 휘두르고(킹 뉴욕에서는 로렌스 피쉬번이 주윤발처럼 쌍권총을 쥐고 싸운다) 데나가 갱에게 총을 쏘는 장면의 박력은 최고.
주연인 조 타멀리스는 <악질 경찰>의 각본가로 <악질 경찰>에서 하비 케이틀이 마약을 하는 장면에서도 잠깐 나온다. 아주 매력적이고 재능있는 여성이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셜록 주니어 (Sherlock Jr. 1924)

감독 : 버스터 키튼
출연 : 버스터 키튼, 캐트린 맥과이어, 조 키튼

이번 <셜록 주니어>는 연주 상영이었는데, 영화가 활기차고 우스꽝스러움에도 불구하고 몽라 씨가 연주하는 음악은 우울하고 구슬펐다. 왜 코미디 영화에 그런 슬픈 연주를? 연주를 듣고 되짚어서 생각해 보니, 버스터 키튼은 영화 속에서 거의 웃지 않는다. 그 한결같은 우울한 표정이라니.
이 영화에는 버스터 키튼 특유의 스턴트가 펼쳐지며 그와 더불어 놀라운 장면도 있는데, 영사기를 돌리다 잠이 든 버스터 키튼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서 빠져 나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명탐정 셜록 주니어가 된다. 꿈과 현실은 물론 스크린과 스크린 밖의 세계가 하나가 된다.

라탈랑트 (L'Atalante, 1934)

감독 : 장 비고
출연 : 장 다스테, 디타 파를로, 미셸 시몽

<라탈랑트>는 파리와 그 외 도시들을 오가는 바지선인 라탈랑트 호의 선장인 장과 그의 젊은 아내 줄리엣의 이야기다. 시골 출신인 줄리엣은 라디오를 통해 들은 파리를 동경하고, 줄리엣이 떠나갈까봐 노심초사하던 장은 줄리엣이 몰래 파리에 외출하자 분노한 나머지 그녀를 두고 떠난다. 왜 이 영화를 특별하다고들 하는 걸까 좀 의아해 하면서 봤지만 정말 아름다운 장면이 하나 있었다. 줄리엣은 장에게 얼굴을 물 속에 집어넣고 눈을 뜨면 진정한 사랑을 볼 수 있다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하고, 나중에 줄리엣을 버린 뒤 그녀가 보고싶은 나머지 폐인이 다 된 장은 물속에 뛰어든다. 물속에 뛰어든 장이 열심히 헤엄을 치면, 줄리엣이 춤을 추는 모습이 환영처럼 나타난다.

우묵배미의 사랑 (A Short Love Affair, 1990)

감독 : 장선우
출연 : 박중훈, 최명길, 유혜리

<우묵배미의 사랑> 같은 영화를 만들었던 장선우 감독은 분명히 범상한 감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불과 30대 중반의 나이에 이 걸출한 두 번째 연출작을 만들었던 장선우 감독은 이제는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연락처를 아는 사람이 없어서 하지 못했다(시네마테크 관계자의 전언)는 사연의 주인공이 되어 버렸다.
도시 빈민으로 살다가 다시 도시 주변의 시골로 밀려난 배일도의 '폼나게 살아보자'는 열망과 남루한 삶에 대한 한탄을 보면, 멀리 사라져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모두 80년대와 70년대의 아이들이며 그 시절의 열망이 아직도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허풍치기 좋아하는 건달인 배일도나 남편을 윽박지르는 그의 억척스런 아내, 심지어는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민공례의 남편까지 누구 하나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영화. 박중훈의 건달 연기는 지금 봐도 정말 재미있다.

뽕 (Bulberry, 1985)

감독 : 이두용
출연 : 이미숙, 이대근, 이무정

에로물의 대명사로 알려진 <뽕>은 굉장히 풍부한 영화였다. (특히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안협집이 진사를 유혹하는 장면에서 보이듯) 해학적이지만 비극적인 울림까지 갖고 있는 영화로 안협집이 마을 아낙들에게 몰매를 맞는 장면이나 결말 부분이 특히 그렇다. 이두용 감독은 대사 한 마디 쓰지 않고도 안협집의 남편이 실은 독립운동가이며, 앞으로도 계속 일경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갈 처지임을, 그리고 안협집이 앞으로도 마을 남자들에게 웃음을 팔며 살아가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는 것 중 한 가지는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이대근이 연기한 머슴 삼돌이가 처음 등장할 때 그가 돌절구를 들어올리기 위해 일어서자 소 울음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는 소같은 인물이지만 영화 내내 근면하게 일하는 대신 발정이 난 것처럼 군다.

최후의 증인 (The Last Witness, 1980)

감독 : 이두용
출연 : 하명중, 정윤희, 최불암, 이대근

검열로 난장판이 되었다는 이 영화는 권력을 가진 자들의 탐욕에 찢긴 부역자 출신 황바우와 손지혜의 일생을 그려낸다. 살인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면서 아울러 이들의 존재와 그 생을 알게 되는 인물은 하명중이 연기하는 오병호 형사인데, 엘리트 출신의 오병호 형사는 이미 아내를 잃은 상태이며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황바우와 손지혜의 자취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는데, 이동하는 내내 끄덕끄덕 졸고 있다.
황바우가 지나칠 정도로 순박하고 어질며(아예 손지혜나 오병호가 황바우를 황바우님이라고 부른다. 감독의 황바우라는 인간형에 대한 숭배가 드러나는 부분이랄까) 그가 어떤 인물인지가 다른 등장인물의 입을 통해 직설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감독이 시대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면서 오히려 황바우가 입체감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보면서 우는 관객들도 많았지만 영화적 재미라는 측면에서는 나는 오히려 이두용 감독의 다른 영화를 들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로 얼룩진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정직하게(어쩌면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고 있는, 마땅히 재평가되어야 하는 영화라는 점에는 이의가 없다. 이 영화의 주연인 하명중은 굉장히 매력적인 배우인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영화 출연이 뜸해졌던 것 같다.

피막 (The Hut, 1980)

감독 : 이두용
출연 : 유지인, 남궁원, 황정순

무당 옥화가 강씨 집안에 쓰인 액을 쫓기 위해 굿을 하면서 과거 이 집안의 며느리와 피막지기 삼돌이를 죽이는 데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나간다. 영화는 신비한 분위기를 잘 이끌어가다가 갑자기 모든 죽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하고 싶어하며, 그러면서 아주 이상하게 끝났다. 피막에서 기도를 하고 있던 옥화의 정체가 밝혀지는 장면에서의 음악도 아예 동떨어진 음악을 쓰고. <피막>은 많이 아쉬웠지만 형편없다고 할만한 영화는 절대 아니다. 특히 유지인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은 최고.

내시 (Eunuch, 1986)

감독 : 이두용
출연 : 안성기, 이미숙, 남궁원, 길용우, 변희봉, 현길수

이두용 감독의 영화 가운데 <내시>가 가장 재미있었다. 이 영화의 왕은 아마 연산군을 모델로 한 것 같은데 역사적 사실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이 영화가 재미있는 것은 1980년대 중반에 나온 영화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전복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어떤 장면이 있느냐면, 후궁으로 들어온 자옥 대신에 하녀인 길녀가 왕과 잠자리를 같이하게 되고 자옥은 왕의 잠자리를 지키는 입직상궁 노릇을 하게 되는데, 같은 날 입직상궁 노릇을 하게 된 다른 궁녀는 왕의 신음소리가 들리자 흥분해서 자옥의 손을 꼭 잡는다. 이렇게 동성애적 감정을 노골적으로 묘사한 작품이 이전 한국영화에서 또 있었을까? 또한 왕의 약을 지어올리는 내시인 변희봉이 내시감 남궁원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장면도 있다. 게다가 이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남궁원이 비인간적인 제도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왕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는 내시라니, 그 당시 상황에서 꽤 아슬아슬한 내용 아닌가?

글로리아 (Gloria, 1980)

감독 : 존 카사베츠
출연 : 지나 롤랜즈, 존 아담스, 톰 누난

2008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 중에서 단 한 편을 고르라면 <글로리아>를 선택하겠다. 화질 나쁜 비디오로 볼 때는 그렇게 생각 안 했지만 스크린으로 보니 얼마나 재미있던지. <복수의 립스틱>과 <글로리아>는 모두 여자가 총을 쏘는 여자고, 또 최고로 박진감 있는 사격씬을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심지어 <복수의 립스틱>에서 데나가 흑인 갱에게 마지막 사격을 할 때는 박수를 치는 사람도 있을 정도로. 그리고 둘 다 필름이 약간 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글로리아>는 세계적으로 프린트가 몇 벌 남아있지 않았는데 정말 힘들게 구했다고 들었다.
전과가 있는 중년 여성 글로리아(영화에서 내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보고 있으면, 글로리아의 본명이 진짜 글로리아인지 문득 의심하는 마음이 든다)는 부모를 마피아에게 잃은 여섯 살짜리 필을 데리고 도망치게 된다. 영화에 나오는 대사처럼 마피아 조직이라는 시스템에 맞서 유유히 도망치는 둘의 모습은 엄청난 쾌감을 준다. 특히 두 장면에 놀랐는데, 처음의 우발적인 총격장면, 그리고 글로리아와 필이 피츠버그로 가는 열차를 타려다 갱들과 만나는 장면이다. 필과 글로리아가 식당에 앉아서 음식을 시키고 덩치 큰 웨이트리스가 두 번 왔다가면 화면 한 쪽의 빈 자리에 어느새 갱들이 앉아 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놀랐다.
또, 글로리아가 필을 묘지로 데려가 가족들에게 인사하게 하는 장면도 좋았다. 필이 아무 묘지나 붙잡고 죽은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고 오면 글로리아는 묘지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는데, 이 장면을 보면 글로리아의 과거가 느껴진다.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감독 : 마틴 스콜세지
출연 : 로버트 드 니로, 조디 포스터, 시빌 셰퍼드, 하비 케이틀

트래비스 비클은 위험한 사이코다. 그가 베트남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창녀나 뚜쟁이, 마약 중독자 같은 도시의 쓰레기들을 쓸어버려야 된다고 믿고 있다. 그는 여자도 증오한다(여자들은 다 똑같다). 유영철과 다른 점이 있다면 트래비스 비클은 타인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고독을 극복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

감독 : 아서 펜
출연 : 워렌 비티, 페이 더너웨이, 진 해크먼, 마이클 J. 폴라드, 에스텔 파슨스, 진 와일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은행강도인 클라이드 배로우와 보니 파커는 자신의 형과 C.W. 모스 같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면서 '배로우 갱'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들이 의적도 아닌데 가난한 사람들은 이들의 편이다. 자신들을 대신하여 은행에 손해를 입히는 데서 만족을 느꼈는지, 아니면 이런 사람들이 대공황기에는 일종의 스타였는지.
이들이 유진 그리자드의 차를 훔치면서 가끔 신경질적이긴 했지만 유쾌했던 영화의 분위기가 바뀐다. 이들과 동행하게 된 유진 그리자드는 자신의 직업이 장의사라고 답하는데, 그 말을 들은 보니 파커는 유진과 그 애인 벨마 데이비스를 차에서 내리게 한다. 그때부터 영화에는 종말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부드러운 살결 (La Peau douce, 1964)

감독 : 프랑수아 트뤼포
출연 : 장 드사이, 프랑수아 도를레악, 넬리 베네데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프랑수아 트뤼포 영화는 재미없다는 선입견을 버리게 됐다. 이렇게 통속적이면서도 섬세한 이야기를 하는 감독이었다니. TV에도 출연하고 지방으로 강연도 다니는(영화에서는 그가 앙드레 지드를 두 번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저명한 지식인인 피에르 라쉐니는 젊은 스튜어디스인 니콜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 유부남이자 명사인 그가 위험한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다. 영화는 피에르와 니콜, 그리고 피에르의 아내인 프랑카의 사랑과 고통을 그대로 전한다. 누구 하나 편들 수 없으면서도, 누구 하나 비난할 수 없는 영화.
재미있는 장면 하나. 피에르가 비행기에서 니콜을 처음 보게 됐을 때 그녀가 신발 갈아신는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데, 나중에 호텔에서 그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갈 때 방 문앞마다 신발이 놓여 있다.

이웃집 여인 (La Femme d'à côté, 1981)

감독 : 프랑수아 트뤼포
출연 : 제라르 드 파르디유, 파니 아르당, 앙리 가르생

8년 전 헤어진 연인이 나란히 옆집에 살게 되고, 그들 사이에 옛 감정이 되살아나면서 결국 파멸해 간다는 이야기다. <부드러운 살결>과 유사한 요소를 몇 개 발견할 수 있는데, 불륜 혹은 두 사람의 과거의 관계가 발각되는 것은 사진 때문이다. 화면이 갑자기 멈추는 이미지가 결정적인 순간에 쓰이고, 주인공의 배우자 혹은 주인공은 상대방의 흐트러진 침대를 보면서 옛 기억을 떠올리거나 고통을 받는다.
다만 <부드러운 살결>이 삼각 관계였다면 <이웃집 여인>은 더 넓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영화는 주브 부인의 나레이션으로 시작하는데 그녀의 고통스러운 사랑은 영화의 주요한 모티브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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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