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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영화 리뷰 2008/08/27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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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 (英雄本色; A Better Tomorrow, 1986)

감독 : 오우삼
출연 : 적룡, 장국영, 주윤발, 주보의, 이자웅, 증강, 석연자, 전풍, 성규안

[영웅본색]을 극장에서 다시 봤다. 첫 장면을 보고 몹시 놀랐는데, 이런 장면도 있었나 싶었던 것이다. 송자호(적룡)가 동생 송자걸(장국영)이 총에 맞아 죽는 꿈을 꾸고 놀라 깨어나는 장면이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본지 10년이 훨씬 넘었으니 첫 장면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첫 장면 뿐만 아니라, 영화 전체가 그동안 생각해오던 것과 많이 달랐다. 기억의 문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다른 문제일 수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유명한 영화이니만큼 줄거리를 길게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홍콩의 위조지폐갱단에 몸담고 있는 송자호는 동생 송자걸을 생각해서 손을 씻으려 하지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해 대만에서 체포되고, 그의 아버지인 송경문(전풍)도 목숨을 잃게 된다. 그리고 송자호의 동생인 마크(주윤발)는 복수를 하고 총에 맞아 절름발이가 된다. 3년 뒤 대만의 감옥에서 출옥한 송자호는 홍콩으로 돌아오지만 자걸은 그를 원수처럼 대하고, 조직을 장악한 그의 옛 부하 아성(이자웅)도 송자호를 괴롭힌다.
줄거리를 돌이켜 봐도 그렇고, [영웅본색]은 당연히 자기를 배신하여 감옥으로 가게 만들고, 출소한 뒤에는 손을 씻지 못하게 괴롭힌 옛 부하에 아성에 대한 송자호의 복수극, 그리고 복수를 향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손 맞잡고 걸어가는 사나이들의 우정 이야기려니 하고 관람했는데 완전히 틀렸다. 홍콩으로 돌아온 송자호는 과거를 씻어버리고 동생과 화해하는 데만 관심이 있으며, 그가 자신을 배신한 게 아성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조차 의문스럽다. 송자호와 거래하던 대만의 조직은(물론 조직을 차지하려는 내부의 음모가 끼어든 일이었지만) 아성과 손을 잡고 송자호를 배신하는데, 송자호는 경찰에게 쫓기던 중 네가 날 배신했느냐며 아성에게 잠시 총을 겨누기도 하지만 자신이 배신했으면 왜 아직 남아있었겠느냐는 아성의 말을 믿고 총을 치운다. 게다가 자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가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까지. 아성의 배신에 대한 설명은 아성이 요 선생에게 하는 단 한마디로 끝난다. “내가 전에 송자호를 팔아먹었는데 이제 와서 그깟 놈(송자호)이 두렵겠느냐.” 송자호에게는 오히려 과거의 배신보다는 아성이 마크 및 자걸을 건드리고 자신이 손을 씻지 못하도록 괴롭힌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컸을 텐데, 그의 행동을 보면 분노나 복수보다는 마크에게 자신의 몫을 돌려주고 동생을 안전하게 만들려는 마음이 더 강해 보인다. 마크 역시 아성에 박대를 받았으면서도 그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을 강하게 품고 있지 않다. 마크는 송자호에게 아성을 털자고 하면서 형을 3년이나 기다렸던 건 내가 잃어버린 걸 되찾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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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호와 마크가 아성에게 복수하려는 뜻을 크게 품지 않는 것은, 그들이 이미 세상에서 밀려난 인물들이며, 그 사실을 자신들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아성을 죽인다고 뭐가 달라지냐는 송자호의 대사를 보라). 송자호가 처제인 재키에게 말했듯, 그는 홍콩에 남아있고 싶어 했지만 그곳이 송자호와 마크에게 어울리지 않는 곳임은 분명하다. 송자호는 자신이 일하는 연합택시회사에 쳐들어온 아성의 부하들을 물리친 뒤 마크와 함께 대만에서 온 형사를 피해 달아나는데, 두 사람은 야산에서 홍콩의 야경을 바라보며 숨을 돌린다. 그러면서 마크가 말한다.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오래 못 가니 아쉬울 뿐이야.” 여기서 이 대사는 홍콩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마크의 처지뿐만 아니라, 오래잖아 중국에 반환될 홍콩의 운명, 그 운명을 기다리는 홍콩 사람들의 심경과도 절묘하게 겹치고 있다. 세상은 변했다. 세상에서는 의리가 사라진지 오래 됐고, 마치 강호의 무사 같이 의리를 중시하는 송자호나 마크 같은 사람들은 아성 같은 악인들에 밀려 사라지게 된다. 그리고 홍콩은 중국에 반환된다. [영웅본색]의 주제가인 당년정(當年情)도 그런 정서를 담고 있는 것 같은데, 영화 홍보물에 소개된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밤은 지나고 다시 해가 떠오르네
영웅은 이미 새벽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네
사나이로 태어나 무엇이 보람 있었나
의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나의 갈 길이었네
훗날 누군가 나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영웅이 죽는 것은 오직 의리 때문이고
그것만이 의로운 죽음이라 말하고 싶네
강호의 세월은 끝이 없는 것임을 나는 탄식하네
난 차가운 이곳에서 산자를 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돌고 묵묵히 홀로 살아간다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생각한 것은, [영웅본색]은 영화 자체의 의의와 더불어 주윤발의 포즈나 제스처(위조지폐에 불을 붙여서 담배를 피우거나 성냥개비를 씹는 등)로도 유명한 작품이었는데 [영웅본색]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오히려 주윤발이 추한 몰골을 하고 있을 때 나온다는 것이다. 위조지폐갱단의 범행 증거가 될 테이프를 빼오기로 결심한 마크는 더러운 옷을 입고 갱들이 위조지폐를 만드는 아지트로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심한 구타를 당했기 때문에 그의 입은 퉁퉁 부어 있고, 얼굴에는 피도 약간 묻어 있다. 마크는 마치 노숙자 같이 보인다. 그리고 곧 마크와 갱들의 총격전이 벌어지는데,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엄청나게 강한 것, 도저히 상대도 안 되는 것에 맞서 싸울 때의 결기와 처절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장면이다. 흔히 오우삼의 스타일로 이야기되는 유려한 쌍권총 사격, 날아다니는 비둘기 등은 이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물론 마크는 쌍권총을 쓰지만, 그게 별로 두드러져보이지는 않고. [영웅본색]은 마치 백조의 노래와 같다. 백조는 죽기 전에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는 전설처럼, 무대에서 퇴장하기 직전의 사나이인 송자호와 마크는 뜨거운 함성을 지르고 사라지는데(한 사람은 감옥으로, 다른 한 사람은 저 세상으로), 그러한 면모가 액션을 통해서 잘 드러나는 것이 아마 이 장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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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에서 또한 두드러지는 것은 길에 대한 대사가 여러 번 반복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송자호가 막 대만에서 출옥했을 때, 마크를 쫓는 대만 형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가 자기 차에 태워주겠다고 하니 우리는 가는 길이 다르다며 송자호가 점잖게 거절하는 장면에서 나오고, 두 번째는 송자걸에게서 나온다. 그는 자신은 경찰이고 형은 조폭이니 우리는 길이 다르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다시 마지막 장면에서 송자호의 입을 통해 나온다. “아걸, 넌 잘못한 게 없다. 우린 길이 달라. 넌 바른 길을, 난 잘못된 길을 걸어 왔어.” 이 대사들을 보면, [영웅본색]은 길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다른 길을 걷는 사람들은 뻗어있는 길을 따라 각자 다른 곳으로 가게 될 텐데, 송자호는 자신이 걷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길은 이상한 방식으로 합쳐지는데, 송자걸이 자기 형이 저지르는 또 다른 범죄의 공모자가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형제는 완전히 화해하고 형은 새로운 길을 걸어갈 수 있게 된다.

[영웅본색]이 완벽한 영화는 아니다. 음악은 좋지만 너무 많이 쓰인다는 느낌이 들며, 장국영의 연기는 다른 배우들에 비해 좋지 않은 편이다. 게다가 장국영이 연기하는 송자걸은 아무리 20년 전이었다고 해도 지나쳐 보이는데, 중요한 증거가 담긴 쓰레기를 통째로 집안에 가져와서 집을 온통 어지른 뒤에, 그걸 아내에게 치우게 하고 자신은 샤워나 하는 꼴이라니. 게다가 송자걸이 형에게 품는 원한에는 분명히 출세가 좌절된 것에 대한 원망도 있고. 간혹 편집이 거칠게 된 부분도 눈에 띈다. 다리를 절던 마크가 멀쩡하게 무릎을 굽히면서 뛰어다니는 장면도 거슬리고. 하지만 분명히 촌스럽고 거슬리는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세월에 씻기지 않은 부분이 이 영화에 남아 있다. 그래서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현대의 한국에서 [영웅본색]이 리메이크 된다는 소식에 불안을 느끼는 것이며, 앞으로도 [영웅본색 2]와 [영웅본색 3]이 다시금 이런 방식으로 개봉을 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다.
덧말. 송자호와 마크, 아성이 같이 술을 마실 때 나오는 노래는 구창모의 희나리를 번안한 곡 같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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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말 두 번째. 쇼브라더스 시절의 영화를 보고 나서야 이 맘씨 좋게 생긴, 머리 좀 벗겨진 아저씨가 영화계를 풍미하던 꽃미남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덧말 세 번째, 서극은 재키가 오디션을 보는 장면에서 심사위원으로 특별출연한다. 재키의 연주를 맘에 안 들어하다 나중에 봉변을 당하게 된다. 성규안은 [영웅본색 2]에서도 그랬지만 여기서도 역시 악당의 오른팔 역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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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5

읽은 책들 2008/08/20 16:19

자치통감 5 - 후한시대 I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삼화, 2007

출판사가 바뀌면서 3권에서 5권으로 넘어갔다.
광무제 유수의 사적을 보면, 한고조 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많았다. 회양왕 경시 원년, 유수는 곤양(昆陽, 하남성 섭현)에서 결사대 3천을 이끌고 왕읍의 43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이 싸움으로 인해 왕망의 천하는 사실상 끝났다. 그 뒤로 경시제의 신하들 가운데 유연과 유수를 경계하는 자들에 의해 유연이 목숨을 잃으면서 스스로도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하북에서 왕랑에게 쫓겨 정신없이 도주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광무제의 사적은 거의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광무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변변한 문학작품도 보이지 않는다. 이건 무엇 때문일까?
이후 한나라 화제 시대에 외척인 대장군 두헌이 권세를 잡고 천하를 호령했는데, 이것은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문제가 후한에도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두헌 일파를 제거한 것은 환관인 정중으로서, 황제가 외척을 견제하면서 환관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제는 원안의 아들 원상을 낭에 임명하고, 임외의 아들 임둔을 보병교위로 임명하였으며, 정중을 대장추로 승진시켰다. 황제가 공훈을 세운 자에게 상을 베풀 때 정중이 매번 사양을 하고 받는 것은 적었는데 황제는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그를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그와 함께 정치적인 일을 논의하니 환관이 권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p.560)

특기할 것은 황제가 두헌을 제거할 뜻을 품은 뒤에 한서 <외척전>을 찾아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로써 황제는 정중 및 청하왕 유경 등에게 자신의 뜻을 알게 하였다. 두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 두괴는 충성심을 품고 자신을 절제함으로써 집안이 망하는 와중에도 홀로 목숨을 건졌지만 끝내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공융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할 때 그 아들들이 했다는 말, 부서지는 둥지에서 성한 알이 남을 수 있겠느냐는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한서를 쓴 반고도 두씨 집안에 붙어 있었는데 두씨가 망하면서 목숨을 잃고 만다. 반고의 여동생인 반소가 뒤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게 된다.
그 외에, 베트남 지역에서 징이, 징측 자매가 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몇년 후에 마원에게 진압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여성 독립 영웅의 활약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5권 이야기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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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死 : 피의 중간고사


감독 : 창
출연 : 남규리, 이범수, 윤정희, 김범, 이얼


전에 리뷰를 쓴 적이 있는데, 스포일러를 섞어서 좀 자세히 써보고 싶었습니다. 참고로 말하자면 저는 이 영화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봤는데, 최종 편집이 끝나기 전이었습니다. 그러니 내용이 약간 달라졌을 수도 있고, 아무래도 직접 필름으로 본 것 보다는 감이 떨어질 겁니다.

영화의 무대가 되는 학교는 창인고라는 학교인데요. 이 학교는 영국의 모 명문고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며칠 후면 영국 학생들이 학교를 방문하도록 되어 있는데, 학교에서는 전교 20등 안에 드는 학생들을 모아서 주말에 특별 수업을 하라고 지시합니다. 국어교사 창욱, 영어교사 소영, 학생주임 치영이 주말에 학생들을 지도하기로 했거든요. 창욱은 학생들에게 인자하고 너그러운 교사고 소영은 창욱이랑은 티격태격하니 사이가 별로 안 좋습니다. 강현이라는 학생은 잘생기고 성격좋은 날라리인데 그 학생이 방송실에서 장난을 한 걸 가지고 치영이 손찌검을 하려는 걸 창욱이 말립니다. 치영은 조금은 나태하고 학생들한테 엄한 편입니다. 이 사람들 외에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이나라는 여학생(남규리)이 있고, 네이버 영화 정보에는 이나에 대한 질투심에 시달린다고 나와 있지만 사실은 이나를 매우 잘 따르는 그녀의 친한 친구 명효가 있습니다. 그 외에도 공부 잘 하고 재수없는, 육성회 학부모를 둔 혜영이라는 여학생,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고 선생을 공격하여 결국 앰뷸런스로 실려가는 조범이라는 학생이 나옵니다.

토요일 학교에는 이 세 선생들과 학생들, 수위가 남습니다. 그리고 강현이 남게 되는데, 강현은 외국에 유학을 다녀온 학생이라 창욱이 필요하다고 부른 것입니다. 그리고 조범도 병원을 탈출하여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옵니다. 이 애들이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학교와 복도에 있는 TV, 스피커를 통해서 방송이 흘러나오는 겁니다. 전교 1등 혜영이 수조에 갇혀 있는 모습이 나오면서 문제를 풀어라, 주어진 시간까지 문제를 풀지 못하면 이 학생은 죽게 된다. 그리고 학교 밖으로 나가도 죽는다. 지금부터 내는 문제를 모두 풀어야 이 문제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면서 학생들이 당황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혜영은 욕조에 물이 차올라서 죽습니다. 학생들의 핸드폰은 여느 때처럼 모두 수거해가서 학생들에겐 핸드폰이 없고, 교사들의 핸드폰도 터지지 않습니다. 치영이 학교 밖으로 도움을 청하러 나가는데, 곧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와서 죽습니다.

학생들이 덜덜 떨면서 교실에 모여 있는데 전교 2등인 동혁이라는 학생이 붙잡혀 있는 모습이 방송됩니다. 여러 개의 양초에서 떨어지는 촛농 때문에 동혁이 고통받고 있는 모습이 보여지고, 두 번째 문제는 한자 문제입니다. 두 번째 문제의 정답은 장자에 나오는 한자 성어로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여덟 자의 글귀인데, 범인이 강당에다 세팅을 다 해 놓았습니다. 손도 빠르지... 도전 골든벨처럼 애들이 맞는 한자어를 찾는데 시간이 조금 오버되는 바람에 동혁이 죽습니다. 성적이 전교 5등쯤인가 되는 이나는 강현에게 성적순대로 죽는 것 같다고 얘기를 하고... 학생들 중에 일부는 같이 교실에 모여 있다가 죽는다, 여학생 기숙사에 숨어 있으면 아무도 모를 거라고 작당을 하고 도망칩니다. 수위가 학교를 아무리 뒤져도 범인이 어디서 범행을 저지르는지는 알 수가 없네요. 그리고 범인은 여전히 문제를 내고, 아이들은 문제를 풀기 바쁜데, 애들이 겨우 이 문제가 무슨 뜻인지 알 것 같다고 해서 가져오지만 또 늦어서 아이가 살해당합니다. 끔찍하게 커터칼 조각이 온 몸에 박혀서 죽어요. 이런 식으로 전교 3등까지인가 4등까지인가는 죽고 이나 차례인데.. 누군가 새벽 중에 몰래 도망친 아이들이 모여 있는 여학생 기숙사를 공격해요. 거기에 명효가 숨어 있었는데 범인이 명효를 잡아가 버립니다. 등수가 그보다 떨어지는 명효가 납치된다, 이쯤 되면 이 영화에서 성적순으로 납치되는 건 트릭이라고 짐작을 할 수가 있는 거죠. ABC 살인사건처럼 진짜 노리는 목표물을 감추기 위한 트릭 말입니다. 그리고 이나는 범인이 내는 문제가 가리키는 것이 김지원이라는 학생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됩니다. 지원이라는 학생은 1학년 때 이나의 단짝 친구였는데(둘이 서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는 장면도 나오고요),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과외도 받지 않고 전교 1등을 먹은 능력자였더랬죠. 어느 날 시험 성적이 전교 1등에서 6등으로 떨어졌는데 그 뒤에 학교에서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어선생과 이나가 명효가 있는 곳을 알고 싶으면 풀어보라고 범인이 낸 문제를 맞춰보니(이 문제는 앞의 문제들에 비하면 정말 간단합니다) 지원이 학교에 다닐 때 반과 번호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풀고 명효를 구할 수 있는가 싶었는데 얼굴이 귀신같이 망가진 범인이 명효를 죽여버립니다. 명효는 이나의 품에서 죽어가고.. 이쯤에서 미치광이처럼 되어버린 창욱은 눈을 부라리고(이범수의 눈부라리는 연기 정말 압권입니다. 진짜로 무섭고 놀랍거든요) 학생들을 공격하던 조범과 그 여자를 공격하여 죽입니다. 강현도 이나와 뭔가 로맨스가 이뤄질 수 있었는데 싸우다가 죽어요. 그리고 학교에서의 악몽같았던 밤이 지나갑니다.

다음 주, 학교는 교환수업은 커녕 7명쯤 되는 학생들의 장례식이 열리는 울음판이 되어버리고, 어쨌든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이나가 누군가에게 다시 납치돼요. 그리고 전교생과 선생들, 학부모들이 모두 강당에 모여 있는데 문이 닫히고 가스가 새어나옵니다. 자신이 내는 마지막 문제라면서, 죄를 지은 사람이 나와서 죄를 고백하면 모든 사람이 살 수 있지만 안 그러면 죽을 거라고 말하죠. 그건 창욱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지원을 죽인 사람은 창욱이었거든요. 지원은 창욱이 육성회 학부모들로부터 돈을 받고 시험 문제를 유출하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창욱에게 가서 따지다 죽음을 당했던 겁니다. 그 광경을 우연히 지켜보게 된 조범도 신경증을 앓다가 미쳐버리게 된 거죠. 창욱이 완전 돌아버려서 옛날 육성회 학부모들한테 나만 죽을 것 같냐고 흉기를 휘두르며 대들고 있는데 수위가 나타나서 창욱을 찌릅니다. 이 수위가 알고 보니 지원의 아버지였던 거예요. 쭉 회상 장면이 나오는데 지원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집안이 망했고, 나중에 지원의 장례식에서 조폭들이 빚받는다며 행패부리는 장면, 지원 아버지가 화장실에서 조폭을 찌르는 장면이 쭉 나옵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지원 아버지가 자기 딸이 다니던 학교의 수위가 된 것이죠. 그 귀신같은 여자는 지원의 어머니였던 것 같은데 왜 얼굴이 그지경으로 망가졌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고, 이나는 구출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사건의 진상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추리입니다. 영화는 뭔가 야리꾸리한 암시를 주면서 막을 내리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모든 계획을 짠 것은 이나입니다. 전교생이 풀어도 한참 걸리는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내는 것, 트릭을 짜는 것, 사건의 진상을 낱낱이 파악하고 대상을 정하는 것 모두가 지원의 부모나 정신이 나간 조범이 하기엔 조금 복잡한 거죠. 지원의 아버지가 학교 수위로 일했으니만큼 학교라는 공간이나 기자재를 이용하는 것은 아주 잘 할 수 있었을 텐데, 거기에도 이나 같은 요즘 아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명효가 죽은 건.. 사실 지원의 부모가 복수하려던 대상은 창욱과 더불어 육성회 학부모의 아이들이거든요. 명효가 그 대상에 들어간 아이였는지는 다시 봐야 알겠지만, 문제가 간단했던 것 등등으로 봐서는 이나는 명효를 살리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원의 부모에겐 명효라고 다를 게 없을 테고, 둘 사이에 엇박자가 매겨졌던 것 아닌가 싶어요. 그럼 이나가 왜 그랬을까요? 지원을 죽인 자들에 대한 복수? 아닐 수도 있죠. 자기보다 공부 더 잘하는 애들을 죽이고 싶었다든지.. 얼핏 봐서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성적 1등부터 20등 사이에 들어갈 아이들을 알리는 방송 테이프에서 전교 1등의 이름이 바뀌는 장면이 있어요. 누구 이름이 누구 이름으로 바뀌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다음에 본다면 이 장면을 잘 봐야 될 것 같아요. 이나의 동기가 진짜로 이런 것이었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이겠죠.

* 영화 초반에 이나가 생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건 정말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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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건 (Breaking News, 大事件, 2004)

감독 : 두기봉
출연 : 임현제, 진혜림, 장가휘, 허소웅, 소미기, 임달화, 임설

며칠 동안에 두기봉 감독의 걸작들로 일컬어지는 <흑사회>, <흑사회 2>, <PTU>, <대사건>을 봤다. 씨네 21의 두기봉 기사에 나온, 우리나라의 두기봉 팬들이 직접 고른 두기봉 영화 베스트 5에는 <흑사회> 시리즈, <PTU>, 혹은 이번 필름포럼의 특별전에서 상영하지 않은 <미션> 등등이 상위에 거론되고 있었고, <대사건>은 조용히 말석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며칠 동안 본 네 편의 두기봉 영화 가운데서 <대사건>이 가장 좋았다. 내 영화보는 눈이 모자란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취향이 특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대사건>은 경찰-범죄자-경찰의 삼각 대결을 그리고 있다. 범죄자인 유엔은 현금수송차 강도 계획을 세우다 경찰과 총격전을 벌인 뒤 일당들과 함께 서민아파트에 은신하고 있으며, 경찰 간부인 레베카 퐁(정확한 계급을 모르겠다)은 경찰이 범죄자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장면이 방영되면서 경찰의 이미지가 실추된 것을 무마하기 위해 총격전 범인 검거 장면을 언론에 대대적으로 선전하는 작전을 짠다. 그녀는 교묘하게 편집된 자료를 언론에 제공함으로써 경찰의 이미지를 제고하려 한다. 유엔 일당과 총격전을 벌인 청 반장은 범인들을 잡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나머지 사건에서 빠지라는 상부의 지시 따위는 무시하고 현장에 뛰어든다.
이들은 각자 다른 목적을 지니고 있으며, 같은 경찰끼리도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 세 주인공은 모두 부정적인 인물들이다. 사람을 파리잡듯 하는 잔혹한 범죄자인 유엔은 물론, 조직을 위해 이미지 조작을 감행하는 레베카 퐁과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 이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하지 않는 무모한 청 반장도 긍정적인 인물이 아니다. 레베카 퐁이 지휘한 경찰의 작전은 결국 시민들에게 위험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청 반장의 무모한 공격 역시 우발적인 상황들을 여러 차례 만들어 낸다. 이렇게 계속 나아갔으면 <대사건>은 서로간의 더러운 대결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었을런지 모른다.
그러나 영화에 변화가 일어난다. 유엔을 비롯한 네 명의 일당은 경찰의 아파트 봉쇄 작전이 시작되면서 두 패로 갈리고, 유엔은 한 가족(아이 둘과 중년 남자 하나로 이루어진)을 인질로 잡고 숨는다. 청부살인을 위해 아파트에 숨어있다가 경찰에게 쫓기게 된 다른 두 명의 범죄자가 이들이 숨은 집에 들어오게 되면서 잠시 어색한 상황이 연출된다. 그러나 유엔은 이들을 다독이는 한편, 다른 범죄자들이 아이들에게 겁을 주는 것을 막고, 모두를 위해 음식을 만든다. 갱들이 식사 준비를 하는 장면은 <익사일>에도 나왔는데,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이들 범죄자들 사이에 흐르는 유대감과 이들 속에 숨어있는 인간미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런 장면들이 나오면서 영화는 속도 빠른 범죄 액션 영화에서 다시금 누아르로 돌아온 듯 보인다. 그리고 나타난 이상한 결말. 폭탄을 다루는데 능한 유엔은 청부업자와 함께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폭탄을 이용하여 빠져나갈 준비를 하면서 청부업자의 목표를 알게 된다. 그리고 청부업자도 유엔의 계획을 알게 되고. 영화의 마지막은 부하들이 죽고 홀로 빠져나온 이들이 상대방의 범죄를 대신 수행하다 실패하는 것을 보여준다. 유엔은 청부업자의 표적이 호텔에서 나오는 것을 저격하다 실패하고, 청부업자는 유엔 대신 현금수송차를 털려다 사살된다. 청부업자의 범행은 유엔이 죽은 다음 날 이루어진 것이라서 우발적인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 합의를 보지도 않았으면서, 이들은 자신의 종말을 상대방을 위해 바친다. <대사건>은 범죄자들이 서로간의 의리를 지키는 영화인가?
하지만 이 영화에는 범죄자들 외에도 경찰 주인공들이 있다. 유엔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영화를 이끄는 두 경찰, 레베카 퐁과 청 반장의 모습을 보게 된다. 청 반장이 "이 새끼 반드시 잡는다"며 차에 부딪쳐 가면서 무모하게 유엔을 추적하다 끝내 그를 따라잡게 되는 것을 보면, 그리고 레베카 퐁이 유엔이 자신을 인질로 사용하기 위해 총을 겨누는데도 "내가 시작한 일을 내 손으로 망칠 순 없다"며 손을 들고 목숨을 구걸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사건>은 범죄자들의 의리 이상을 말하고 있다. <대사건>은 홍콩누아르의 '의리'가 남의 피나 빨아먹는 하찮은 깡패들, 부패한 경찰들의 '뒷배 봐주기'를 넘어서 윤리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영화 같다. 밥을 나눠먹고 잠시 함께 숨어있었던 잔인한 범죄자들이 한마디 말도 없이 서로의 범죄를(성공 가능성도 없는) 대신해주고 그러다 죽는 것, 비열하고 무모한 경찰들이 범죄자들에게 무릎 꿇기를 거부하거나 그들을 끝까지 따라잡는 것은, 자신들이 악하고 어리석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그런 자신들에게도 윤리가 있고 그것을 반드시 지킬 거라는 웅변으로 들린다. <대사건>을 언급하는 영화평론가들과 영화매체들은 초반 5분간 진행되는 롱테이크 액션씬을 말하지만, 이 액션씬보다는 <대사건>의 절정부가 훨씬 더 매력적이었다. 장가휘가 연기하는 청 반장은 달리는 차에 부딪쳐도, 오토바이에서 미끄러져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유엔을 잡으러 온다. 꼭 터미네이터 같이. 그런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은 어쩌면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일 수도 있는데, 장가휘의 연기는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대신, 이 무모한 경찰의 윤리의식과 책임감, 의지가 한꺼번에 폭발하는 순간을 만든다. 장가휘가 절뚝거리며 유엔 앞에 서는 장면은 기꺼이 이 영화 최고의 장면이라고 말하고 싶다. 레베카 퐁의 부드럽지만 꺾을 수 없는, 강한 결기도 그것을 뒷받침하고...
가령 한 호에 숨어 있던 범죄자들이 다른 호에 숨어있던 사람들까지 몽땅 내보내는,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도 있지만 <대사건>은 속도도 몹시 빠르고 재미있으며, 씨네 21의 기사에 나온 대로 인물 묘사도 풍부한 영화였다. 임달화와 임설은 이 영화에서 조연을 맡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 동안 출연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다. 진혜림이 맡은 레베카 퐁은 냉정하고 딱딱한, 별 매력이 없는 인물인데, 진혜림은 잘 소화해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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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