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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8/20 자치통감 5 by Wolverine
  2. 2008/07/10 세계 대전 Z by Wolverine
  3. 2008/02/11 아마데우스 by Wolverine
  4. 2008/02/11 자치통감 3 by Wolverine
  5. 2007/12/19 자치통감 2 by Wolverine

자치통감 5

읽은 책들 2008/08/20 16:19

자치통감 5 - 후한시대 I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삼화, 2007

출판사가 바뀌면서 3권에서 5권으로 넘어갔다.
광무제 유수의 사적을 보면, 한고조 만큼이나 극적인 순간이 많았다. 회양왕 경시 원년, 유수는 곤양(昆陽, 하남성 섭현)에서 결사대 3천을 이끌고 왕읍의 43만 대군을 물리쳤으며 이 싸움으로 인해 왕망의 천하는 사실상 끝났다. 그 뒤로 경시제의 신하들 가운데 유연과 유수를 경계하는 자들에 의해 유연이 목숨을 잃으면서 스스로도 위험에 처하기도 했고, 하북에서 왕랑에게 쫓겨 정신없이 도주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광무제의 사적은 거의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광무제 시대를 배경으로 한 변변한 문학작품도 보이지 않는다. 이건 무엇 때문일까?
이후 한나라 화제 시대에 외척인 대장군 두헌이 권세를 잡고 천하를 호령했는데, 이것은 전한을 멸망시킨 외척 문제가 후한에도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두헌 일파를 제거한 것은 환관인 정중으로서, 황제가 외척을 견제하면서 환관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황제는 원안의 아들 원상을 낭에 임명하고, 임외의 아들 임둔을 보병교위로 임명하였으며, 정중을 대장추로 승진시켰다. 황제가 공훈을 세운 자에게 상을 베풀 때 정중이 매번 사양을 하고 받는 것은 적었는데 황제는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그를 똑똑하다고 생각하여 항상 그와 함께 정치적인 일을 논의하니 환관이 권력을 사용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p.560)

특기할 것은 황제가 두헌을 제거할 뜻을 품은 뒤에 한서 <외척전>을 찾아보게 했다는 것이다. 그로써 황제는 정중 및 청하왕 유경 등에게 자신의 뜻을 알게 하였다. 두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 두괴는 충성심을 품고 자신을 절제함으로써 집안이 망하는 와중에도 홀로 목숨을 건졌지만 끝내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공융이 조조에게 죽임을 당할 때 그 아들들이 했다는 말, 부서지는 둥지에서 성한 알이 남을 수 있겠느냐는 고사를 떠올리게 하는 일이다. 한서를 쓴 반고도 두씨 집안에 붙어 있었는데 두씨가 망하면서 목숨을 잃고 만다. 반고의 여동생인 반소가 뒤를 이어 한서를 완성하게 된다.
그 외에, 베트남 지역에서 징이, 징측 자매가 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몇년 후에 마원에게 진압당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끝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여성 독립 영웅의 활약을 상상해볼 수 있었다. 5권 이야기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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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Z

읽은 책들 2008/07/10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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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대전 Z
맥스 브룩스 지음, 박산호 옮김
황금가지, 2008

<세계 대전 Z>는 '좀비 전쟁' 이후 작성된 '전투 후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좀비 전쟁을 겪은 세계 각국 사람들의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름만 보고서일 뿐 저자의 견해조차 나와 있지 않으며(그 점에 대한 견해는 서론에 정리되어 있다), 독자들은 좀비 대전의 전개 과정을 인터뷰를 통해 추측하고 재구성해야 한다. <세계 대전 Z>는 보고서라는 이름을 빌린 소설, 그것도 전통적인 양식이 아니라 인터뷰로 구성되어 있는 소설이며 마지막 부분을 이제껏 인터뷰한 생존자들 중 일부의 발언으로 다시 정리한 것은 명백히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한다.
결과는? 이 소설은 좀비들이 창궐하면서 일어나는 사회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세계 대전 Z>는 지금까지의 좀비 관련 작품들이 생략하고 넘어갔던 부분들까지 그려낸 굉장히 재미있는 소설이다. 특별한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세계 각국의 다양한 인간 군상이 재앙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흥미롭기 그지없다(특히 좀비가 우글거리는 아파트에서 일본 오타쿠가 빠져나오는 장면은). 다만 한국 국정원 부원장과 인터뷰하는 부분은 북한 사회의 집단주의를 너무 과대평가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 아무래도 세계의 많은 나라를 다루다보니 각자 자신들에 대한 묘사가 정확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소설의 재미를 깎아먹는 것은 아니고.
소설을 보면 좀비 재앙이 일어난 초기에 좀비에 물린 사람들 일부가 바다에 버려지는데, 이들은 몽땅 살아나서 밖으로 걸어나온다. 그렇게 살아난 좀비들은 물속에 있다가 들어오는 희생자를 찾기도 한다. 그러나 좀비 전설에 따르면 좀비들은 부두교 사제가 주술로 지배하는 시체로, 소금을 먹으면 사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제정신을 차린다. 다시 죽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좀비는 소금기 가득한 바다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 하긴, 이제 대중문화 안의 좀비는 더 이상 부두교의 좀비가 아니다. 좀비 이야기에서 부두교적인 요소는 거의 완벽히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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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데우스

읽은 책들 2008/02/11 18:29

아마데우스
피터 셰퍼 지음, 신정옥 옮김
범우사, 1993

<아마데우스>를 보다가 예전에 장정일이 <독서일기>에서 언급했던 구절을 찾아냈다.

모차르트  음악적인 것은 제외하고죠! (그는 흥분하여 앉는다) 화내시니 말고 말씀해보세요. 왜 이탈리아 인들은 음악의 복합성을 겁내는지? 이탈리아 사람들은 세계에서 가장 단출한 마음씨의 사람들이지요. 강직하고 지배적이고, 또 강직하고 지배적이고,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서 부활할 때까지! 그런데 인물에 대한 그들의 생각엔 싫증이 난단 말입니다. 주인공은 열정적이고, 여주인공은 순진하고. 늙은이는 수전노. 가정교사는 음흉하고, 사소한 모순도 없다 이 말입니다!......
난 진짜 인간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사실적인 장소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부인의 내실! 나에게는 부인의 내실이야말로 이 지상에서 가장 흥분을 주는 장소라고 생각해요! 마루에 흩어진 내복-여인의 체온이 남아 있는 슈미즈-잠자리 밑엔 넘칠 정도로 차 있는 요강! (pp.155-156)

살리에리  (관객에게) 그리하여 <돈 조반니>에서는 부친의 유령이 나타났습니다. 나의 <다나이우스> 오페라보다도 더욱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의 유령이 나타난 거죠. 거기에다 지옥으로 던져질 '죄많은 방탕아'의 모습이 또 나타난 거구요!

실루엣이 사라진다. 모차르트가 마루 위에 남아 있다. 하인들이 안락의자를 치운다.

나는 그가 일상 생활 속에서 그의 예술을 창조하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그도 저도 평범한 사람들이었습죠. 그러나 그는 평범함에서 비범한 전설을 창조해낸 겁니다. 그런데 난 전설에서 고작 평범한 작품을 창조했을 뿐이었죠!...... 그가 <돈 조반니>를 무대에 올렸는데, 나는 또 하나의 하찮을 골동품을 무대에 올렸답니다. <오르무르의 왕 악수르>를 말입니다. (pp.192-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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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3

읽은 책들 2008/02/11 17:47

자치통감 3 (한나라 말기)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푸른역사, 2002

 
일찌기 제갈량은 출사표를 통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기에 전한이 흥성했으며 소인을 가까이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했기에 후한이 몰락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적어도 전한 말기의 정치를 보면 어진 신하를 가까이하고 소인을 멀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간신 석현(石顯)의 세력은 성제가 즉위하면서 소탕되었지만 성제(成帝)는 외척인 왕씨들에게 권력을 쥐어주었다. 왕씨의 우두머리인 왕봉(王鳳)은 두흠(杜欽)을 등용하여 좋은 정치를 베풀기도 했고 왕씨 가문에서는 간혹 강직하고 훌륭한 인사들이 등장하긴 했으나, 왕봉은 정적인 왕상(王常)이나 왕장(王章) 같은 인물들을 철저히 숙청했다. 왕씨 집안 사람들은 황제도 눈살을 찌푸릴만한 심한 사치를 누렸고, 성제 자신은 후에 여색에 빠져 황후를 폐위하고 조비연(趙飛燕)을 대신 황후로 삼기에 이르렀다. 또한 성제 치하에서는 외척뿐 아니라 순우장(淳于長) 같은 간신들이 등장하게 된다. 애제 시대에는 왕씨의 세력이 쇠퇴하였으나 부태후(傅太后)를 중심으로 한 애제의 외척들이나 황제의 총애를 받은 동현 등이 권세를 떨쳤다. 황하에서는 수재가 되풀이되었으며 한의 조정에서는 이를 막지 못했다. 간간이 도적들이 나타났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민심이 조금씩 이반했던 것 같다. 왕망(王莽)은 이때 등장했다.
성제와 애제(哀帝) 곁에는 바른 말 하는 신하들도 있었고 왕도 외척들의 권력 독점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끝내 외척이나 권신들을 저버리지 못했다. 이 무렵 눈에 띄는 것은 절대 권력을 지닌 황제의 우유부단함인데, 외척이나 총신을 감싸고 잘못이 있어도 확실하게 내치지 못했다. 자치통감에서는 직접적으로 이렇게 적고 있다.

효성황제 시절에 정권이 왕씨의 집안으로 들어간 것을 보았던 황제(애제 : 글쓴이 주)는 즉위하자 대신들을 죽이면서 군주의 권위를 강화하려 하였고, 무제와 선제를 본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참소하고 아첨하는 사람들을 아끼고 믿었으며, 충성스럽고 곧은 사람을 미워하였다. 그리하여 한나라의 대업은 이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p.374)

왕망은 성제의 외척인 왕씨 집안 출신으로 왕씨 집안 사람들 중에서는 다르게 인망이 있었다. 왕망은 자신을 낮추고 관직에 임용된 뒤에는 강직한 정치를 펼쳐 인심을 얻었지만 자치통감에서는 왕망이 인심을 얻기 위해 교활한 처세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애제가 붕어한 뒤 태후인 왕정군(王政君)을 등에 업고 집권한 왕망은 외척 세력과 조정에 있던 간신들을 일거에 몰아내고 권력을 잡았는데, 그 뒤로 왕망이 한을 무너뜨리고 신(新)을 세우는 과정을 보면 불가사의할 정도로 저항이 없다. 이건 정말 미스테리다. 그나마 바깥에서 왕망에 저항하는 반란이 몇 차례 일어나긴 했으나 너무나 쉽게 제압되었고, 조정 안에서는 왕망에 반대하는 움직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다. 왕망의 독단적인 정치에 반대하던 신하들은 사직하는 등 소극적인 처신으로 일관했고, 그나마 왕망의 아들인 왕우(王宇)가 일으킨 여관(呂寬)의 사건 같은 것도 어떤 움직임이라고 보기엔 힘들 것 같다. 밖에서 반란이 거의 벌어지지지 않은 것은 유씨 성 가진 제후들의 세력이 계속해서 쇠퇴해 왔기 때문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겠지만 안에서 이토록 저항이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치통감> 3권에서는 왕망이 황제로 등극한 후 벌어진 실정과 적미(赤眉)의 봉기,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의 등장을 서술하는데 왕망이 세운 신의 실패를 보면

1. 대외 정책의 실패(사이四夷들이 왕을 칭하는 게 고대의 제도에 위배된다는 뜻에서 흉노의 인수를 왕공의 도장에 넣는 새璽 대신에 제후의 도장에 넣는 장章을 새긴 도장으로 바꿔 주었는데 이는 "선우의 인새와 다른 신하의 것 사이에 아무런 차별도 없"(pp.480-481)다는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신에서는 흉노에 맞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신은 고구려와도 마찰을 일으켰으며 다른 민족들의 반란도 이어졌다)
2. 경제 정책의 실패(한대에 유통되던 오수전 대신 새로운 화폐를 유통시키려 했으며 화폐 제도의 혼란에 따른 여러 가지 부작용이 나타났다. 또한 <자치통감>에서는 물가안정책인 오균五均과 전매제도인 육관六筦 같은 제도도 복잡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지우게 한, 실패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3. 제도의 미비 혹은 잦은 교체(여러 군이나 봉국에 소속된 관할 구역을 다시 나누고, 없애거나 새로 설치하거나 바꾸어서 천하에는 일이 많아졌고 관리들조차 고쳐진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다. p.423 또 제도를 바꾸는 것을 좋아하여 명령이 매우 번잡하였기 때문에 어떤 일을 시행하려고 할 때 번번이 물어서 일을 처리하였는데, 이런 일이 앞뒤로 계속 이어져서 한 가지 일을 아직 완전히 처리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다음 일을 벌이는 식이었다. 왕망은 항상 새벽이 되도록 등불을 켜고 나라 일을 돌보았지만 그래도 감당할 수가 없었다. p.529 혹은 왕망이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아직 완비되지 않아서 위로는 공후부터 아래로는 말단 관리까지 모두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왕망의 제도가 번잡스러운 것이 이와 같아서 세금을 부과하지만 계산하는 것이 이치에 맞을 수가 없었고, 관리들은 끝내 봉록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관직을 통하여 부정한 행위를 하고 뇌물을 받아서 스스로 생활하였다. pp.530-531)
4. 유능한 신하들을 믿지 못하여 처형하거나 면직시킨 사례가 극히 많고, 기근 같은 자연 재해가 발생
5. 후에 신선을 믿게 되면서 큰 공사가 빈번히 발생하여 국가 재정을 좀먹음

이렇게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왕망 정치의 실패는 유가적 이상주의의 실패로 보인다.
"왕망은 속으로 제도가 정해지면 천하는 자연히 태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지리를 깊이 생각하며, 예의를 제정하고, 성악(聖樂)을 만들며, 육경(六經)에 합당한 이론들을 강구하였다. 공경들은 해 뜨면 입궁했다가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는데, 몇 년을 논의해도 결정되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소송 등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거나 백성들의 급한 일을 돌볼 시간이 없었다.
그리하여 현령이 빈 자리가 되어 몇 년이 지나도 태수가 여전히 겸직하고 있으니 탐욕스럽고 잔학한 짓이 날로 심해졌다."(p.528)


봄, 정월에 흉노인 호한야선우가 장안에 와서 입조하며 스스로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한나라와 친해지기를 원하였다. 이에 황제는 후궁 가운데 양가자(良家子)인 왕장(王嬙), 자는 소군(昭君)을 선우에게 내려주었다. 선우는 환영하며 즐거워하였다.(p.57)
솔직히 이제까지는 왕소군을 전설속의 인물로만 생각했다. <자치통감>에는 왕소군의 아들이 나중에 흉노의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황상이 미행을 하다가 양아공주(陽阿公主)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노래하고 무용하는 조비연(趙飛燕)을 보고 반하여 궁궐로 불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 후로 조비연은 크게 총애를 받았다. 조비연에게 여동생이 있어 이를 다시 불러들이니, 자태와 성품이 더욱 농염하고 순수하여 좌우에서 모두 쉬지않고 감탄하였다.(p.161)
남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서 춤을 출 수 있었다던 그 조비연. 조비연의 행실은 별로 좋지 않았는데, 나중에 애제 사후 정권을 잡은 왕망에 의해 폐위되자 자살하였다.

부마도위(駙馬都尉) 겸 시중인 운양(섬서성 순화현) 사람 동현(董賢)은 황상에게 총애를 받아서 황상이 나갈 때에는 참승(參乘) 하였으며, 들어와서는 황제의 좌우에서 시중을 들었으므로 상으로 받은 재물이 거만(鉅萬)이나 되었고, 그 귀함은 조정을 진동시킬 정도였다. 항상 황상과 더불어 잠자고 일어났다. 한번은 낮잠을 자는데 옆에 있는 황상의 옷소매를 베고 잠이 들었다. 황상이 깨어 일어나려 해는데 동현이 잠에서 깨지 않자 동현을 깨우고 싶지가 않아서 마침내 소매를 자르고 일어났다.(p.323)
이 일 때문에 동성간의 애정을 나타내는 단수지벽(斷袖之癖)이라는 고사가 생겼다.

성제 시대의 부평후(富平候) 장방(張放)은 황제와 잦은 연회를 벌여 간신으로 지탄을 받았는데 황제가 붕어하자 곡하다가 죽었다. 이에 대한 평가. "장방이 황상을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충성심을 갖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랑하면서도 충성심이 없으니, 어짊을 해친 사람입니다."(p.259)

같은 달에 전휘광(前煇光, 장안시 남부) 사람인 사효(謝囂)가 무공(武功, 섬서성 무공현)의 현장인 맹통(孟通)이라는 사람이 우물을 파다가 하얀 돌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위는 둥그렇고 아래는 네모로 되어 있으며 붉은색 글자가 돌에 새겨져 있다고 상주하였다. 그 글에는 '안한공 왕망에게 고하니, 황제가 되라'고 씌어 있었다.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징표를 주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p.431)

또 유자라고 하였던 유영(劉嬰)의 유모에게는 유영과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하였고, 항상 사방이 벽면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생활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른이 되었을 때에도 육축(六畜)의 이름조차 모르게 하였다.(p.465)
왕망이 전한의 마지막 황제였던 유영에게 한 짓을 보면 여후가 척부인을 인간 돼지로 만든 것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인다.

적의(翟義)의 일당인 왕손경(王孫慶)이 체포되었다. 왕망은 태의(太醫)와 상방(尙方, 주방 담당자), 그리고 기술 좋은 백정들을 시켜서 그의 배를 가르고 가죽을 벗겨서 오장을 꺼내게 하였다. 그런 뒤 대나무를 가늘게 만들어 그의 혈관을 따라가면서 처음과 끝나는 곳을 알아보고는 병을 고친다고 하였다.(p.534)
그러나 이런 기록을 보면 왕망의 잔혹함에 대한 <자치통감>의 기록은 과연 믿을만한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에서 인간의 혈관과 그 역할에 대해 알기 시작한 것은 과연 언제부터인가?

또 특이한 기술을 갖고 있어서 흉노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널리 모집하면서, 보통의 순서와 지위에 구애받지 않는다고 하니 좋은 방법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의 수가 1만 명을 헤아렸다. 그중 어떤 이는 물을 건너는 데 배가 필요하지 않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말들의 머리와 꼬리를 잇게 해서 100만 명의 군사를 호송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또 어떤 이는 한 말의 양식을 갖고 가지 않아도 약물만 먹으면 군대 전체가 배고프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하루에 1,000리를 날아갈 수 있어서 흉노를 정탐할 수 있다고도 하였다. 왕망이 이 사람의 재능을 시험해보았더니, 큰 새의 깃털을 가지고 두 개의 날개를 만들어서 머리와 몸에 붙이고 고리와 끈으로 조종하는데, 수백 걸음을 날아가다가 떨어졌다.(p.544)

이건 아마 인류 최초의 비행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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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 2

읽은 책들 2007/12/19 18:37

자치통감 2 (한나라 중기 편)
사마광 지음, 권중달 옮김
푸른역사, 2002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부터 권28을 번역한 책이다. 시간적으로 효무제(孝武帝) 원삭(元朔) 5년(기원전 124년)부터 원제(元帝) 영광(永光) 2년(기원전 42년) 사이의 일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기에는 흉노와 잦은 전쟁이 벌어졌다. 한나라의 대규모 군사 작전의 영향과 내부 분열 등으로 무제 이후 흉노는 약화되었다. 무제는 흉노와의 전쟁에 많은 돈을 들였는데, 전쟁 때문에 국가 재정이 악화되었다. 황제는 흰 사슴의 가죽으로 피폐(皮幣)란 것을 만들었는데 한 개에 40만 전으로 하고 왕후나 종실에 속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를 쓰도록 만들었다. 무제는 흉노뿐만 아니라 조선, 남월, 서역 등을 공격하는 데도 공을 들였다.
무제 집권 말기에는 무고(巫蠱) 사건이 벌어진다. 황제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누명을 쓰게 된 위태자(衛太子)가 궁지에 몰린 나머지 궁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결국 태자는 도망갔다가 자살하게 된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태자와 관료들의 갈등이 있었고, 무제는 태자가 죽은 뒤에 그에게 잘못이 없다는 걸 깨닫고 후회했다.
무제는 어린 아들 유불능(劉弗陵)을 태자로 세우면서 황제의 생모인 구과부인(鉤戈夫人)을 죽였다. 임금이 나이가 어리고 어머니가 권력을 휘두르면 여후 때처럼 나라가 어지러워질 수도 있다는 이유였다.
무제는 금일제(金日濟, 흉노 출신), 곽광(霍光 표기장군驃騎將軍 곽거병霍去病의 이복동생), 상관걸(上官桀) 등에게 태자를 돌보게 했는데, 태자는 즉위하여 소제(昭帝)가 되었다. 금일제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곽광이 권력을 쥐게 되면서 차츰 밀려나게 된 상관걸은 역모를 꾀하다가 실패하였다. 소제는 현명한 황제였으나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아들이 없는 소제 대신 창읍왕(昌邑王) 유박(劉髆)이 즉위했다가 불과 27일 만에 쫓겨나고 만다. 그 후에 나라를 물려받은 사람은 죽은 위태자의 손자인 유병기(劉病己, 나중에 백성들이 기휘하기 편하게 어려운 이름으로 바꿈)로, 그는 즉위하여 선제(宣帝)가 된다. 선제는 젊은 시절을 궁이 아닌 민간에서 보냈으며 백성들의 애환을 잘 알고 있었다. 곽광의 부인 곽현(霍顯)은 작은딸을 왕후로 만들기 위해 황후를 독살했고, 곽광이 죽은 후에 곽 씨 일족은 역모를 꾀하다 발각되어 멸족되었다.
선제는 내치와 외치에 성공한 황제였고 명신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간혹 훌륭한 신하들을 버리는 일이 있었다. 선제는 법에 따른 통치를 중시하였는데 태자가 유학에 의한 통치를 중시하는 것을 보고 태자가 나라를 어지럽게 할 것이라고 한탄했다. 그는 내심 다른 태자를 세우고 싶었으나 태자가 자신이 서민이었던 시절에 생긴 자식이며 독살당한 황후가 낳은 아들이라 바꾸지 못했다. 선제의 말대로 태자는 유약하여 홍공(弘恭)이나 석현(石顯) 같은 간신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이하는 인상 깊거나 재미있는 대목들.


대장군(大將軍) 위청(衛靑)과 표기장군 곽거병은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뛰어난 장군들이었으며, 곽거병은 위청의 생질이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자치통감에는 위청 때문에 자살한 이광(李廣)의 아들 이감(李敢)이 위청에게 부상을 입히자 얼마 후에 곽거병이 이감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둘의 성격은 서로 반대였다. 자치통감은 위청이 겸손하고 온화하며 선비를 좋아한 반면 곽거병은 젊어서부터 귀하게 되어 사졸들의 어려움을 살피지 않았다고 전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는 혹리열전(酷吏列傳)이 있고, 자치통감에도 혹리들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그뒤 의종(義縱)은 정양(定襄) 태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정양에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혀 있던 중죄인과 경범죄인 200명 모두를 조사하였다. 그리고 죄인들의 빈객과 형제로서 사사로이 감옥에 들어와 죄수를 면회했던 사람 200명을 한꺼번에 체포하여 국문하였다. 그런 다음 말했다.
“죽을죄를 지은 사람에게 족쇄를 풀어 벗어나게 해주고 싶다.”
그러고는 그날로 400여 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서 보고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군에 사는 사람들은 춥지도 않은데 벌벌 떨었다. (p.70)


확실히 지금보다는 사람들의 목숨값이 훨씬 가벼운 시대였다. 요사스런 말을 퍼뜨리는 것, 혹은 전쟁에 지는 것도 죽을 죄였다. 자치통감 군데군데 전쟁에 지고 돌아온 장군들이 사형을 당하는 대신 속죄금을 내고 서인이 되었다는 기사가 보인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이런 저런 죄목으로 죽은 신하들이 많다.

무제 원수 6년(기원전 117년) 반순복비(反脣腹誹)의 죄가 생겼다. 입술을 삐쭉 내미는 죄라는 뜻으로, 조정에서 불편한 것을 말하지 않고 속으로만 비방하는 것도 죄가 되었다는 말이다. 반순복비의 죄가 생기면서 공경과 대부들은 대부분 아부만 하면서 보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나라에서 조선을 공격했을 때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와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이 서로 반목했는데, 순체가 사신으로 온 공손수(公孫遂)의 도움을 받아 양복을 체포한 뒤 끝내 조선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순체는 서로 공을 다투고 질투하여 계획을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당했으며, 양복은 돈을 내고 속죄를 받아 서인이 되었다. 공손수가 돌아가서 처형된 것을 보면 무제는 순체의 죄가 더 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무제는 이릉(李陵)이 흉노와의 전투에서 지고 항복한 뒤에 그를 변호한 사마천을 거세했는데, 자치통감에 따르면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릉을 구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이릉이 흉노에 있을 때 이릉의 가족들이 헛소문 때문에 모두 죽임을 당했으므로 이릉은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끝내 돌아가지 않았다. 반면 흉노에 억류된 소무(蘇武)는 오랜 세월 동안 고초를 겪다 한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릉과 소무가 헤어지는 장면은 이 책에서 가장 슬픈 대목 중 하나다.

무제 때부터 무리를 지어 횡행하는 군도에 대한 기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만큼 백성들이 살기 어려웠다는 반증.

소제가 죽었을 때 후사가 없었으므로 무제의 아들로 황제의 자리를 이어야 했는데, 그때 살아 있던 무제의 아들은 광릉왕(廣陵王) 유서(劉胥) 한 사람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광릉왕은 본래 하는 짓이 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결국 황제가 되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광릉왕은 음탕하고 힘이 셌는데, 한번은 곰과 싸우다 물려 죽을 뻔 했다고 한다. 곰과 싸우는 건 황제로서의 결격 사유인가.

창읍왕은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곽광 등에 의해 쫓겨났다. 낭중령인 공수(龔遂)는 창읍왕이 황제가 되기 전에 충직한 말을 많이 했다.

낭중령인 산양 사람 공수는 충성스럽고 후덕하며 강직하였다. 또한 절개가 높아 안으로는 창읍왕에게 간언을 했으며, 밖으로는 창읍왕의 사부와 재상에게 책임을 이야기하였는데, 경전의 뜻을 인용하고 화와 복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문득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아부하지 않고 자기를 생각하지 않아 창읍왕인 유하의 허물을 면전에서 지적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창읍왕은 일어서서 귀를 막고 달아나면서 말했다.
“낭중령은 욕쟁이야!” (p.304)


창읍왕은 귀여운 사람이다. 그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것은 사악한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궁중의 법도나 예의를 전혀 지키지 않았던 탓이다. 난잡하고 음란하다고나 할까. 그는 관원이나 관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취한다거나 황제의 시신이 떠나지도 않았는데 연회를 연다거나 하는 등의 일을 저질렀다.

이에 승상과 어사는, 하후승(夏侯勝)이 조서를 비난하는 의논을 하고 먼저 돌아가신 황제를 훼손하여 무도하다고 탄핵하는 상주문을 올렸다. 그런데 승상부의 장사(長史)인 황패(黃覇)가 하후승을 비호하자 두 사람 모두 하옥되었다. (중략)
한편 하후승과 황패가 오래 갇혀 있게 되자 황패가 하후승에게 <상서>를 배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후승은 죄를 지었으므로 곧 죽을 것이라 하면서 거절하였다. 이에 황패가 말했다.
“아침에 도에 관한 말을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하후승은 그 말이 현명하다고 여기고 드디어 그것을 가르쳐 주었는데, 옥에 갇혀서 두 번 겨울이 지나는 동안 그의 강론은 조금도 게을러지지 않았다. (p.332)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장면이다. 다른 장면을 꼽으라면 능신이었으나 교활하고 부도한 죄로 처형된 좌풍익(左馮翊) 한연수(韓延壽)가 처형되기 전 백성들과 이별하는 장면을 고르겠다.

광천왕(廣川王)인 유거(劉去)가 그 스승과 희첩 10여 명을 죽이는 데 연루되었다. 그는 심지어 납이나 주석을 녹여 입에다 들이붓거나 지체(肢體)를 해한 뒤 독약을 넣고 이를 끓여 그 시체를 없애버렸다. 그를 폐위시켜 상용(上庸, 호북성 죽산현)으로 추방하였더니 자살하였다. (p.344)

이건 아마 역사상 최초의 연쇄 살인사건?

삼성은 백호(白虎)를 말한다. 세 별이 곧게 늘어서 있는데 이것이 형석(衡石)이며, 아래로 세 별이 날카롭게 늘어서 있는데 이것을 벌(罰)이라고 한다. 여기에 패성이 나타나면 병란이 일어날 징조라고 생각하였다. (p.548)

548페이지의 각주에 나와 있는 설명이다. 삼성이란 건 오리온자리를 말하는 것 같은데, 패성은 어떤 별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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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