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 (The Wig, 2005)
감독 : 원신연
출연 : 채민서, 유선, 문수, 사현진, 소이
여기 수현과 지현 두 자매가 있다. 수현은 백혈병 환자로, 병원에서도 가망이 없다고 퇴원시킨 몸이며 지현은 교통사고로 목소리를 잃어버렸다. 지현은 수현에게 예쁜 긴 머리 가발을 선물해 주고, 가발을 쓴 수현은 달라지게 된다.
이 영화를 보고 얻은 소득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몸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가 깨닫게 된 것이다. 삭발한 수현이 벌거벗은 채 욕조에 앉아 울고 있을 때, 카메라는 그녀의 등을 보여주는데 그 몸에서는 막막한 고통만이 느껴진다. 머리카락이 없는 여성의 몸은 섹슈얼리티를 발산하는 몸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에서 가발을 쓴 수현이 아름다움을 되찾고 언니의 애인인 기석을 유혹한다는 전개는 이런 깨달음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유선 때문에 이 영화를 봐야 된다고 나를 데려간 친구는 몸을 웅크린 채로 영화를 봤지만, 나에겐 이 영화가 그리 무섭진 않았다. 둔감해진 탓인가. 그래도 <가발>은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독특했다. 다락방 장면에서 얼굴 없는 귀신 이야기를 차용한 것은 좋은 아이디어였고, 수현이 머리를 긁어내릴 때 피묻은 알약들이 떨어져 내리는 장면, 혹은 옛 애인을 유혹하는 동생에 대한 질투와 애정이 고루 들어간 유선의 연기도 좋았다. 하지만 다른 영화와 닮은 설정들, 그리고 불필요한 장면들은 이 영화를 깎아내린다. 지현의 친구인 경주가 가발을 탐내는 장면에서 나는 이 영화를 "분홍가발"이라 불렀고, 지현이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장면은 "주온가발"이라 불렀던 것이다. (물론 이어지는 장면이 좋기 때문에 이런 비판은 상쇄되어야 할 것이다.) 여고생들, 그리고 지현의 친구인 경주의 죽음 같은 장면은 나는 없어도 그만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쁜 것은 이 영화의 반전으로 동성애자에 대한 스테레오타입과 편견을 반복하는 고루한 설정이었다. 말하자면 동성애자들은 집착의 화신이라는 얘기인데, 사실 그런 식의 반전이 등장해야 할 필요성도 없는 것 같다. 마지막 장면은 슬프지만, 좀 더 신파적으로 가야 했다. 신파적으로 갔어야 더 슬픔을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참 후에야 생각나는데, 예전에 내겐 말을 못하던 친구가 있었다. 사고를 당했는지, 병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 나는 물어보지 않았다. 그 친구는 말로,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을 열심히 표현하고자 애썼다. 이 영화에서는 지현이 의사에게 필담으로 대화하려고 하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필담은 정말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녀석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다시 생각난다.
- 2005. 8. 19
이올린에 북마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