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 (The Grudge, 2004)
감독 : 시미즈 다카시
출연 : 사라 미셸 겔러, 제이슨 베어, 빌 풀먼, 그레이스 자브리스키, 클리 듀발, 료 이시바시, 마키 요코, 오제키 유야, 후지 다카코
몇 해 전에 개봉한 극장판 [주온]은 보면서 꽤 실망한 영화 중 하나였다. 좀 무서워질 만하면 여지없이 끊고 다른 장면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 유명한 이불 장면에서 황당함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나는 극장 한 쪽 구석에서(스카라 극장에서 진행한 시사회였는데) 끊임없이 비명을 질러대던 사람들을 잠시 의심하기도 했었다. 혹시 고용된 것 아닐까?
하지만 [착신아리], [링] 같은 작품에서도 드러나는 저주의 확산이라는 모티브, 그로 인해 빚어지는 불쾌한 분위기와 복잡한 플롯, 숨겨진 의미가 빚어내는 난해함은 꽤나 매력적이었다. 만약 [주온]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부분에 흥미를 느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시미즈 다카시 감독이 헐리우드로 건너가서 만든 [그루지], 즉 [주온]의 리메이크 버전은 피터라는 남자의 자살 장면으로부터 시작한다. 화창한 아침, 그는 베란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부인이 보는 앞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몸을 뒤로 꺾는다. 이런 자살 방식은 상당히 부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느닷없이 벌어지는 터라 놀랍기는 했다. 지나가다 놀란 사람들이 망연히 멈춰서서 땅에 떨어진 피터를 바라보고 있으면 카메라는 팔다리가 꺾인 채 고요히 숨을 거둔 그의 몸을 비추고 이윽고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간다. 그리고 피터에 이어 요코라는 여인네가 예의 그 저주받은 집에서 목숨을 잃는 장면이 나오면 영화는 비로소 주온다워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호러퀸 사라 미셸 겔러가 연기한 카렌이다. 카렌은 교환 학생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왔는데, 남자 친구인 더그와 나누는 얘기를 들어 보니 사실은 그와 헤어지기 싫어서 일본으로 온 것 같다. 그리고 일본은 그녀에게 낯설고 적대적이다. 카렌은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가는 여자에게 길을 물어보는데 아이는 엄마 뒤로 숨어서 카렌을 바라본다. 아이들이 낯선 사람들에게 별로 호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는 의미가 다를 것이다.
[그루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설정이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일본에서 생활하는 미국인들이고 그들은 이 낯선 땅에서 소외감과 막막함을 느낀다. 엠마 가족의 며느리인 제니퍼는 이사온 첫 날, 밖에서 길을 잃었다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돌아오는 데 애를 먹었던 경험을 털어놓고, 슈퍼마켓으로 음식을 사러 가서는 사발면에 몰래 구멍을 내서 확인을 해 본 뒤에야 물건을 구입한다.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귀신에게 쫓기게 된 수잔은 경비원을 만났을 때 순간 말이 통하지 않아 움찔한다. 수잔이 택시를 잡아타고 도망치는 장면에서도 어딘가 굉장히 막막한 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녀에게는 옵션이 많지 않았으니까.
이런 설정을 제대로 활용했다면 상당히 흥미 있는 공포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리메이크의 본의에 걸맞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예컨대 중풍과 근육 마비 증세로 홀로 가야코의 집에 누워 있는 미국인 노파 엠마. 왜 그녀는 낯선 나라의, 하필이면 귀신 들린 집에 홀로 누워있는 것일까. 혹시 숨은 설정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영화가 더 재미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루지]는 중반부터 [주온]을 갉아먹는다. 원작대로라면 가야코의 귀신들린 집에서 마땅히 죽었어야 할 카렌이 살아서 경찰에게 발견된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할 것이다. 길게 늘어나는 머리카락의 이미지처럼 확산되어야 하는 저주가 카렌에게 막혀서 더 이상 뻗어나가지 않는 것이다. 역시 호러퀸을 그냥 버릴 수는 없었던 것일까. 영화가 귀신과 카렌의 대결로 집중되면서 스펙터클이 더 좋아지기는 했다. 하지만 그 정도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는 헐리우드에도 많다. 굳이 리메이크를 해야 했던 것일까.
더욱 황당한 점은, 가야코와 토시오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이 영화가 일일이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가야코가 왜 계단을 기어 내려올 수 밖에 없는지, 토시오는 왜 고양이를 데리고 있는지, 왜 다락방에 들어가면 죽는지. 그걸 하나 하나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원작의 불가해한 분위기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저주의 가지가 대폭 줄어들면서 플롯도 훨씬 쉬워졌다. 마지막에는 친절하게도 카렌이 집에 불을 지르는 데 실패함으로써 저주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까지 암시하려 한다. 이로써 저주는 집에 불을 지르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대상화되었다. 정말 친절한 시미즈 감독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으로 눈알 귀신을 보여준 것. "이게 동양귀신이다!" 그리고 개봉 당시 미국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했다는 점 외에는 별 의의가 없다.
사족) 일본인 형사가 카렌에게 주온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은 정말이지 뜬금없었다. 알면서 자기는 왜 들어갔담. 게다가 집에 불을 지르려면 굳이 집안에 들어갈 필요가 없을 텐데.
관객의 대부분은 고등학생이었는데(구로 CGV 1회) 그들은 상당히 만족하는 듯한 눈치였다. 얼핏 들어봐도 시시하다는 얘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바로 옆에 앉아있던 여학생 한 명은 무서워서 나가야겠다고 영화 보는 내내 안절부절 못할 정도였으니까.
[안녕, 형아는 꽤 관객이 많이 든 것 같다. 1, 2회가 모두 매진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것 만으로는 알 수 없다. [살인의 추억]과 같은 날에 개봉한 [보리울의 여름]도 그때 목동 CGV에서는 연속 매진이었으니까. 그때 [살인의 추억]은 매진이 되지 않았다.
- 2005. 5.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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