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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의 역사

읽은 책들 2006/12/25 17:48

강간의 역사 (Histoire du viol)
조르쥬 비가렐로 지음, 이상해 옮김
당대, 2002


프랑스의 사회학자 조르쥬 비가렐로는 이 책에서 15세기 이후 프랑스의 사례를 중심으로 강간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다. 이 책이 강간의 역사가 아니라 강간의 해석의 역사를 다뤘다는 지적은 일리가 있지만 큰 흠은 아니며, 지역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강간의 역사>에는 보편성이 있는데 프랑스의 앙시앵 레짐이나 다른 구체제에서 여성을 보는 시각, 사회적 관계가 별로 틀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은 5부로 나뉘어 있는데 5부에서야 현대의 사례가 등장하며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이 글은 책을 정리한 것으로 각 단락의 제목은 임의로 정했다.


앙시앵 레짐

법률에 따르면 강간은 엄중히 처벌받도록 되어 있지만 기소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는데, 폭력과 강간에 대해 재판부는 관용을 보여줬다. 당시의 사법 당국은 처형이나 고문 장면을 대중에게 공개함으로써 "공포의 이벤트"를 연출하곤 했지만 이는 사법 당국의 무력함을 반영한다. "이러한 의식들은 몸을 훼손시킴으로써 몸을 경시하는 풍조를 확산시키고... 점점 그 수위를 높여가는 폭력을 정당화시키며... 정교화된 폭행을 승인해 주는 이상한 효과를 가져왔을 뿐, 당시 법집행의 일상을 전혀 반영해 주지는 못한다."(p.23) "지난 5년 동안 생-브리외에서는 사형선고를 받아 마땅한 범죄가 12건이나 발생했는데도 그 가운데 범인이 체포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p.24)
여러 가지 훈령이나 칙령에 따르면 강간 범죄의 처벌은 교수형, 고문, 차형 등이다. 행위에 따라 그 심각성의 정도를 달리 봤는데 처녀성을 망치기 때문에 피해자의 나이가 어리면 어릴수록 죄가 무거워졌다. 근친상간, 후견인이 피보호자에게 행한 범죄의 죄질도 무거웠지만 전시 강간에 대해서는 관대했다. 하지만 살인 등의 범죄가 동반되지 않았을 경우, 가해자가 처벌을 받더라도 법조문에 쓰여 있는 것과는 달리 채찍형, 벌금형이 전부였으며 대부분은 소송이 기각되는 것으로 결말이 났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회적 신분은 상당히 큰 역할을 했는데 비천한 하층민이 높은 신분의 여성을 욕보이는 경우 지배계급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해서 엄한 처벌을 내렸지만 반대의 경우는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 18세기 근대 유럽의 가족 구조는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하인들이 늘어났는데, 하녀에 대한 주인의 폭행도 만연해 있었으며 이는 거의 처벌받지 않았다. 또한 특기할 것은 이 시대에선 노상강도가 강간보다 훨씬 가혹하게 처벌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약자들의 안전보다 재산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강간은 폭력의 산물인 동시에 희생자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며 인격을 훼손시키는 범죄로, 강간을 당함으로써 더럽혀졌다는 생각이 희생자의 입을 닫고 주위에서 희생자를 비난하도록 한다. 이 시대 강간의 두드러진 특징은 강간을 범한 자들이 자신이 폭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이다("서로 좋자고 그러는 거니까"). 또한 가해자는 희생자 쪽에서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확신한다. 1770년 10세의 아이를 범한 죄로 재판을 받은 크리스토프 이자벨은 아이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사례들은 흔하다. 사회에서는 여성이 먼저 남성을 유혹한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강간과 성폭력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여러 가지 사례는 "육체적인 쾌락의 추구뿐 아니라 약한 존재에 대해 우월성을 증명해 보이려는 의지"(p.44)를 보여준다.
17, 18세기에 발생한 강간 사건들은 즉각적이고 우발적인 경우가 많았는데 1760년 파리의 난로공 앙투안 가로디는 화장실에 갔다가 만난 8세의 여자아이 마리 잔 셰뉘를 자기 방으로 끌고 와서 자기 가족 앞에서 강간했다. 이 시대 강간범들은 희생자의 나이를 따지지 않았으며 어린 희생자들을 자신을 먼저 유혹한 파트너로 간주했다.
로카르(E. Locard)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파리고등법원에서 1540년부터 1692년 사이에 맡은 강간 범죄는 49건이다. 이는 희생자들이 고발을 꺼렸으며 그에 따라 재판이 극히 적게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나마도 유죄 판결을 받는 경우는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처녀성의 상실은 명예와 신분의 추락, 가격의 하락을 의미했기 때문에 희생자의 주위에서 먼저 침묵을 강요했다. 몇몇 재판에서는 피해자가 숫처녀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피의자가 석방되기도 했다. 강간은 육체를 훼손하는 범죄로 인식되었으며 피해자의 정신적인 면은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이 시대에는 강간을 음탕한 행위로 보았는데, 특히 남색이나 근친상간 같이 신성모독적인 행위로 여겨진 범죄의 경우 희생자에게도 처벌이 가해졌다.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경우에 처벌이 가해진 것은 아니며 14세(혹은 12세) 이하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선도 있었다.
강간도 이 시대엔 신성모독의 범죄로 여겨졌기 때문에 피해자에게 어떤 폭력이 행해졌는가의 여부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오히려 피해자가 가해자와 공모한 것은 아닌지 의심을 받았다. 도덕적인 잘못과 종교적 죄악을 근거로 삼은 판결 외에도 여성에 대한 편견 역시 폭력을 은폐하는 요인이 된다. "강간의 역사는 의식 표상의 역사뿐 아니라 여성성 표상의 역사와도 만나게 된다. 이처럼 여성에게 주체의 지위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다양한 방식들도 성폭력을 은폐하는 데 일조를 한다."(p.61)
로마법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강간 여부는 저항하는 외침이 사람들에게 들렸느냐, 들리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립되었다. 희생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력을 다해 반항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으며 희생자의 평판은 중요한 참고사항이 되었고 가해자가 희생자에게 가하는 정신적인 압박, 끝까지 저항할 수 없게 만드는 제약은 모두 무시되었다. 여성이 음탕하기 때문에 몸을 허락한다는 전통적인 편견이 공공연하게 표명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법은 남자 혼자 여자를 강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게 받아들였다.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도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였는데, 칼집이 움직이면 어떻게 칼을 칼집에 넣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따르면 강간 피해자는 가해자를 받아들인 셈이 된다.
16세기에 잠든 여주인을 하인이 겁탈하려던 사건은 여주인을 무혐의처리하고 하인을 간통죄로 교수형에 처했는데, 이는 범인이 여성의 소유자인 남편의 권리를 침해한 데에 내려진 형벌이다. 판례는 또한 희생자가 윤락녀라는 것이 증명되면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괴라는 용어가 강간이라는 말을 대신하여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특기할만한데 남편 혹은 부모가 희생자를 소유하고 있다는 관념과 관련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유혹에 의한 유괴가 폭력에 의한 유괴보다 더 심각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몸에다 마음까지 주었으니 더 위험하다는 것이다. 18세기 초반까지 의사들은 처녀막의 존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폭행과 처녀성 상실을 진단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의학적으로 강간을 입증할 능력이 없었다.
강간이 성행위인 동시에 소유와 권력의 과시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간통을 저지른 아내를 벌하기로 마음먹은 알바니아 귀족이 거친 인부 12명을 모아놓고 자신의 아내를 강간하도록 독려한 사례가 있다.

18세기 말

사람들의 강간에 대한 감수성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때까지 볼 수 없던 태도와 행동이 차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체형과 고문에 대한 비판이 늘어나기 시작하고, 절도가 폭력보다 늘어나면서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이 오히려 높아지기 시작한다. 앙시앵 레짐 시대에는 사회에 폭력이 만연해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에 무감각했던 것이다. 범죄를 불경이나 신성모독같은 종교적 죄악과 구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볼테르 같은 계몽철학자들을 중심으로 높아지는데, 이때 출현한 논평들은 특별히 야만적인 강간 사건과 사법부의 무기력함을 부각시킴으로써 앙시앵 레짐과 근대를 구분지었다. 차츰 잔인성, 폭력적인 범죄는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한정되고 특수한 것으로 인식된다. 이 시기에 사드 후작이 로즈 켈레르라는 여인에게 채찍질을 가해 여론을 들끓게 만든 아르케이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사건은 귀족들에 대한 일반의 거부감, 폭력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부모의 권위에 근거한 가부장적 질서가 서서히 무너지고 가족간의 감정적 거리가 좁혀진다. 아이에 대한 감시가 강화되고, 특히 아동의 연약함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다."(p.116) 새로운 아버지 상이 제시되고 아동 강간에 대한 고소와 분노가 늘어나며 범인을 잡기 위한 공동체의 집단 행동도 눈에 띈다. 그러나 이러한 여론의 변화가 판결에 큰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는데, "어린 희생자들에 대한 연민과 피의자에 대한 전통적인 관용 사이의 대립"(p.124)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아이에게 책임이 있다는 인식 또한 여전히 남아 있어서 "도덕적 인식이 폭력의 포착에 여전히 걸림돌이 되고 있다. 치한의 책임은 아이가 '타락'한 만큼 경감된다."(p.128)

프랑스 대혁명

1789년 7월 20일 인권선언문을 통해 인간이 자기 자신의 유일한 소유자이며 그 권리는 양도될 수 없다는 원칙이 표명되고, 강간은 여성을 소유한 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유괴가 아닌 개인에 대한 폭력적인 범죄라는 인식이 법조문에 반영된다. 1791년, 형법 제29조에 강간을 저지르면 징역 6년에 처해진다는 조항이 생겼다. 그러나 여성은 시민적 주체가 되었지만 공민적 주체는 되지 못했으며 법정에서는 인권선언에도 불구하고 강간 사건에서 아버지, 혹은 남편의 특권을 유지시키는 판결이 계속된다. 앙시앵 레짐의 모델은 건재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강간인가, 강간이 아닌 성폭력은 어떻게 처벌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 법률상의 한계가 있었다. 구체제에서는 유죄로 인정되었던 협박과 술수에 의한 강간이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건 또 다른 한계였다. 아직 남성이 여성에게 행사하는 정신적 폭력의 문제는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희생자에게 시선을 돌리도록 만든 것은 그래도 이 시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1791년 제정된 형법으로 강간은 개인에 대한 범죄가 되어, 적어도 법률상으로는 강간이 도덕적 타락,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되지 않게 된다. 강간은 한 인격에 대한 침해, 사회적인 범죄가 된다. 물론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으로 보고 도덕적 심판을 내리는 시각은 엄존하고 있지만 적어도 강간당한 아동을 고소하는 사건은 1791년 이후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1791년 당시에는 남성에 대한 강간, 성폭력을 정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에 이 문제는 논의 대상이 된다. 후에 강간이 아닌 성폭력을 정의하기 위해 '공공외설행위', '양속에 대한 침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경범죄 판정이 훨씬 높긴 하지만 유죄 선고도 늘어난다. 물론 소송 건수는 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적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제정된 법률은 범죄들을 세분화하고 범죄들의 사이에 경계를 정함으로써 처벌을 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이 법률로 인해 아동에 대한 강간의 고소가 계속 증가하게 된다. 성폭력을 엄히 처벌해야 한다는 확신 또한 집단 행동과 여론의 압력을 통해 가시화된다. 

19세기 - 나폴레옹 법전

강간과 같은 폭력적인 범죄는 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한 농촌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게 계몽주의자들의 주장이었는데, 19세기엔 그 원인을 기후나 민족성에 주로 돌리게 된다. 공적인 장소에서의 폭력적인 태도는 크게 줄어들고 1832년에는 카르캉(쇠고리로 죄인의 목을 말뚝에 매다는 형벌)이 폐지된다. 공개적인 처형장이 사라진 자리를 범죄의 이야기, 통계에 대한 관심이 메우는데 언론들, 특히 <라 가제트 데 트리뷔노> 같은 신문은 범죄에 대한 호기심을 부추기며 재판의 드라마틱함을 강조하고 재판소를 공연장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 신문은 논란거리가 될 만한 사건들을 선별, 예고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1825년부터 프랑스 법무부는 전국에서 일어난 범죄와 판결을 모아 형법행정총람을 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통계와 언론의 논평을 통해 범죄의 서열이 차츰 새로 매겨지게 되는데 아직 절도가 살인보다 위에 있고 성폭력은 여전히 중시되지 않고 있지만 강간이 농촌에서만 발생하는 범죄라는 인식은 사라진다. 1850년 무렵에 이르면 대부분이 아동폭행인 강간 범죄의 고소 사건은 중범재판소에서 심리하는 재판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증가하고, 범죄의 위상이 높아진다.
1810년 제정된 나폴레옹법전은 법률적 사고에 일대 혁신을 가져오는데, 1810년 제정된 형법 제331조는 강제외설행위와 강간을 구별하였다. 1829년 한 석공이 자기 옷을 벗기고 돌로 성기의 길이를 잰 동료들을 고소하는데 피의자들은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강제외설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기소가 가능했다. 이 법은 성폭력을 여성을 추행하는 범죄로만 규정하지 않고 있으며, 따라서 성범죄의 목록이 늘어나고 심각성에 따라 서열이 정해진다. 비역 행위가 강제외설행위로 지칭되고 여성의 몸을 더듬는 침해 행위 같은 것도 강제외설행위 범주 안에 들게 된다.
1826년 9월 30일 샤르트르 근방의 오노 수도원에 침입한 한 사내가 자신을 천사라고 지칭하며 수녀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가 기소되었다. 이 행위가 공공외설행위인지 강제적인 침해행위인지 논란 끝에 피의자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재판은 오랫동안 혼동되었던 모욕(관객들의 수치심을 자극)과 침해(피해자의 몸을 겨냥)가 분리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새 법은 각 행위의 경계를 더 명확히 설정할 것을 요구한다. (참고로 키스는 19세기엔 지나친 외설 행위로 간주되었으며 입 속에 혀를 넣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금물이었다. 한 구두장이의 애인이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하여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자친구를 죽이려 한 사건도 있었다.)
1810년 법전은 또한 미수 행위도 처벌의 대상으로 삼았다. 실행된 범죄만을 법을 어긴 것으로 본다는 기존의 관념을 깨뜨린 것이다. "이처럼 새 조항은 성폭력의 스펙트럼을 두 배로 늘려놓는다."(p.174) 그러나 대부분 재판에서는 강간 기도를 강제외설행위 등으로 기소함으로써 심각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었다. 아직 침해행위의 범위와 개념이 명확히 정립된 것은 아니었다. 또한 19세기 초반의 판례들은 아동의 성기와 성인의 성기 크기가 달라 삽입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에 근거하여 아동강간 사건을 강간, 강간기도 대신 강제외설죄로 기소하고 있다. 물론 형량은 무겁게 내려졌으나 이를 강간으로 간주하지 않은 것은 강간을 범한 사람의 입장에서 행위를 해석했기 때문일 것이다.
1810년의 법에는 또한 정신병자들의 폭력이 추가되었다. 형법 제64조는 피고인이 행위를 하는 순간 정신착란 상태에 있었을 경우 범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규정하였다. 1824년 한 여자아이를 강간 살해하고 심장을 빨아먹은 앙투안 레제 사건 같은 심각한 일들이 벌어진 바 있고, 재판소에서는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정신과 의사들의 의견이 차츰 고려되었고 범죄자의 인격에 대한 연구, 성폭력 행위들에 대한 분류 작업이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1810년 제정된 법은 풍속의 침해라는 장을 만들어 범행의 심각성이 잘못이나 죄악이 아닌 안전을 위협하는 행위에 있음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도덕의 위반이 아니라 육체의 침법과 관련된 장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혁명법에서 폐지된 간통죄가 부활하였고 이는 여성의 간통만을 처벌하였다. 풍속침해죄에 저촉되는 행위는 관습에 의해 결정되었다. 결국 1810년의 법은 남녀간의 불평등을 다시 고착화시킨 부정적인 측면과 성폭력을 서열화한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19세기에도 한동안 신체적인 강제만이 강제적인 행위로 인정되었지만 이러한 확신은 차츰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동 강간을 비롯하여 비슷한 사건들이 무죄로 선고된 사례에 대하여 언론에서 유감을 표명하게 되고 1832년에 형법이 개정되어 피해자가 기준 연령에 미치지 못하면 모든 강제외설행위를 폭력적인 것으로 간주하도록 하였다. 1863년에는 "혼인을 통해 독립하지 않은 13세 이상의 미성년자에 대해 직계존속이 행한 모든 강제 외설행위"(p.192)까지 처벌함을 명시하게 되었다. 1850년대 이후에는 아동에게 행해진 것 이외에도 정신적 폭력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며 여성이 잠든 사이에 일어난 강간 사건도 과거의 판례를 뒤엎어 유죄를 선고하고 있다. 1870년대 무렵에 이르면 강간이 반드시 물리적인 폭력이나 힘이 사용되어야 성립하는 것은 아님이 인식되고 주인의 협박, 상관의 강요를 못이겨 갖게 된 성관계 등이 범죄의 범주에 들어가게 된다. 법적 실천은 여전히 뒤떨어져 있지만 법적 성찰과 판례는 직권남용을 더 상세히 분석하였고, 세기말이 되면 직권남용은 명확한 범죄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희생자에 대한 의심이 남아 있었는데, 성인 강간의 무죄석방률은 1860년대 이후 30여년간의 통계에서 50%를 넘으며 이는 아동 강간의 무죄석방률의 두 배 이상으로, 성인 범죄에 대한 기소는 얼마간 증가추세였지만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이는 19세기에도 사적 공간에서 일어난 범죄는 거의 기소되지 않았다는 사정을 보여준다.
법적 성찰과 현실 사이의 거리와는 별개로 도시에서는 새로운 감수성이 형성되는데, 아동 강간에 대한 고발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합의를 거부하는 추세를 보인다. 19세기 중반에 도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도시 빈민과 변두리 거주자를 새로운 위협으로 보는 시선이 생겨났지만, 19세기 후반 일용노동자 집단이 대거 이농하고 프롤레타리아들이 도시에 적응하면서 강간 재판은 감소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발생한 범인을 놓고 보면 산업 노동자보다는 도시 소시민 계층에 속하는 영세업자 등이 주류를 이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계를 보면 중범재판소의 기소는 감소하는데 소송은 계속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강간범을 중범 대신 경범으로 기소하여 형량을 낮추는 대신 석방을 막는 편법이 만연했던 사법 관행을 보여준다.
어린이들은 근대 이전 성적인 범죄에 가장 많은 희생을 당했던 집단이었다. 이는 성적인 궁핍이 심해졌을 때 약한 자들을 대상으로 행해지는 지배 행위였다. 그러나 19세기에는 교사나 성직자의 어린이들에 대한 강간과 추행이 사회를 경악하게 했고, 이들은 다른 범죄자들과 다른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성범죄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다.
 
강간범의 발명

1880년대 강간에 관한 논평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변화는, 아동 강간이 특수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오면 아동 강간은 회복 불가능한 탈선으로 간주되었다. 1827년 "어린아이 두 명에게 파렴치한 짓을 한 혐의로"(p.238) 기소된 메당이란 자가, 부인이 미인인데 예쁘지 않은 아이들에게 그런 짓을 할 까닭이 없다는 이유로 석방된 적이 있는데, 19세기 말에는 아동강간이 성인여성에 대한 강간과는 다른 욕망 때문에 저질러짐이 강조되고 있다. 아동을 성적인 대용물로 삼는 시도 역시 줄어들고 어린이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것에 대한 반감은 커지고 있었다. 아동강간과 더불어 근친상간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언론이 1880년대 들어 가장 관심을 보인 사건은 아동 강간-살해 사건으로 어린이들에 대한 범죄 행위를 맹렬히 비난하기 위해 살해 행위가 더욱 부각되었다. 1847년 툴루즈에서 발생한 세실 콩베트 사건은 여론을 불러일으켰으며 1890년 정부의 어린 딸을 강간 살해한 보다블은 성난 군중들 때문에 경찰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실제 폭력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으며 세기말 아동 범죄 관련 보도에서는 성폭행의 이미지보다는 구타, 끔찍한 상처, 폭행 등이 훨씬 강하게 부각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살인과 폭력이 절도를 밀어내고 최악의 범죄 자리를 차지한다.
살인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범죄를 두개골의 해부학적 특징과 연결시키려는 가설이 등장하여 발전했지만 오래지 않아 신뢰를 잃었다. 범죄자 개인의 개성에 관심을 두는 심리학이 탄생하면서 범죄자들의 죄목과 정신병의 목록의 상관 관계를 찾아내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19세기 말에는 크라프트-에빙에 의해서 성적 변태행위라는 주제가 정의되는데 변태 행위들에 대한 연구는 변태 행위가 평범한 행위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대중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괴물들은 우리 밖에 아니라 우리 안에 있다."(p.260) 사람들은 범죄는 부랑자나 유랑민 등 사회의 주변 인물들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통념을 만들어내 불안함을 씻고자 했으며 세기의 전환기에는 후에 연쇄살인범이라 불리는 새로운 부류의 범죄자들이 나타났다. 프랑스에서 최초의 연쇄살인 용의자로 체포된 자는 조제프 바셰로 1897년 체포되어 총 28건의 범죄 혐의로 1898년 12월 31일 처형되었다.
성인강간이 유죄를 선고받는 일이 드물고 여론도 아동 희생자의 심리적인 상처보다 희생자가 일으킬지 모를 성적인 방탕을 더 염려하긴 했지만 19세기 말에 들어서야 성범죄에 대한 정의가 완성되고 심리학이 탄생하였다. 행정 통계가 처음으로 성폭력의 증가를 통계로 제시하면서 강간에 대한 시각이 서서히 현대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강간과 오늘날의 사회

1974년 벨기에 여성 두 명이 마르세유 근처의 해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다 그 지역의 불량배 세 명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두 여성은 곧바로 인근 경찰서에 신고하고 긴 재판에 돌입하게 된다. 이 재판을 통해 강간에 대한 투쟁이 여성 해방의 의미를 획득하고 강간을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새로운 인식이 대두하게 된다. 강간 피해자들의 정신적 외상이 범죄의 심각함을 결정하는 주요한 참고 사항이 되는 한편 강간 범죄의 각 단계는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되어, 희생자가 처음에 거부 의사를 비쳤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재판은 희생자의 도덕성에 관한 의심을 떨쳐버리고 1810년 이래의 법전을 뒤집어 희생자 중심의 논리를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 6월 28일 프랑스 상원회의는 강간과 외설행위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기로 결정하고, 그 안에서 범죄의 경중을 구분하는 작업을 다시 거쳤다. 최종 법안은 자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는 모든 침해행위를 중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중범죄와 경범죄를 명확히 구분해냈다.
1992년 12월 16일 다시 다듬어진 형법은 풍기문란이라는 단어를 없애고 성적 침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폭력, 강제, 위협 혹은 술수를 사용해 저질러진 모든 침해행위는 성폭력의 구성요건이 된다."(p.307) 이 법적 쇄신은 일체의 성별에 대한 암시를 거부하고 도덕의 여부를 배제하며 주체가 입은 성적 침해만을 강조하고 있다. 1992년 형법 제222-23조에 성희롱이라는 범죄가 명시된다. 개인들간의 경계는 점차 세밀해진다. 그리고 언어추행이 성폭력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된다.
범죄에 대한 시각의 변화에 따라 오랫동안 은폐되어 온 여러 범주의 범죄들이 고려의 대상이 되었는데 부부강간, 매맞는 아내,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신입생 신고식, 감옥의 강간, 전시강간(일본의 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마지못한 사과, 세르비아의 인종청소, 1944년 독일 군대의 니스 습격 등) 같은 것들이다.
어떤 도둑이 훔친 테이프에서 페도필리의 장면들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함으로써 수사가 시작된 사건이 있었다. 아동에 대한 강간은 아이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피해를 입힌다는 인식이 받아들여지면서 아동 성범죄에 대한 인식에 일대 변화가 일어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성폭력을 당한 적이 없는지 잘 기억해 보라며 정신과 의사가 환자를 부추긴 사건에서 나타나듯이 아동 성범죄를 놓고 긴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근친상간과 페도필리의 희생자들이 침묵을 깨고 증언을 시작한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이제 유혈과 폭력에 쏠렸던 대중의 관심은 내면화된 폭력, 심리적인 폭력으로, 대중들의 두려움은 야만인이나 부랑자보다 겉보기에 멀쩡한 변태 성욕자에게로 이동한다. 성범죄자 연구는 앞선 시대에 그렇게 진행되었던 것처럼 범죄자들의 분류, 세분화에 더 큰 노력을 쏟아부을 것이다. "재범을 피하기 위해 죄인을 고치고 형벌에 치료의 필요성을 부여하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p.338)이 창출될 것이며 "성폭력은 더 이상 악의 영역이 아니라 보건위생 영역에 속하고, 그것의 평가는 윤리학이 아니라 과학의 몫"(p.339)이다. 폭력에 대한 혐오가 커지면서 필연적으로 성폭력을 규탄하고 성범죄자를 경원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지만 이 분위기의 반작용으로 형벌의 실행으로 범죄자를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침해받는 문제에 대해 심도깊은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치료의 의무화는 과거의 공포적인 탄압으로 회귀하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지만 이런 방식이 악을 근절시켜 줄 것이라는 환상은 버려야 한다.

- 2006. 10. 15

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