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만 폴란스키'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07/08/19 혐오 by Wolverine (8)
  2. 2007/08/11 박쥐성의 무도회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by Wolverine
  3. 2006/12/25 악마의 씨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by Wolverine

혐오

영화 리뷰 2007/08/19 12:56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혐오 (Repulsion, 1965)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출연 : 카트린느 드뇌브, 존 프레이저, 이본 프루뇌, 이안 헨드리, 패트릭 위마크


이 영화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 캐롤이 신경증과 강박증을 앓으면서 점점 미쳐가고, 결국 파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영화의 제목인 <혐오>는 캐롤의 성에 대한 혐오를 나타내는 것이며, 캐롤이 어떤 일을 겪었기에 그런 강박관념과 신경증을 갖게 되었는지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캐롤은 지속적으로 벽이 갈라지고 그 벽에서 손이 튀어나오는 환상, 어딘가에 숨어있던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는 환상을 계속 경험합니다. 특히 언니와 언니의 애인이 옆방에서 밤중에 벌이는 섹스, 캐롤을 바라보는 남자들의 시선, 그녀를 짝사랑 하는 남자의 구애 등등은 그녀의 신경을 더욱 건드립니다. 영화는 캐롤의 가족 사진을 보여주면서 끝나는데 그걸로 보아 캐롤은 어린 시절에 어떤 사건을 경험한 뒤 그런 증세들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영화는 이야기에 집중하기 보다는 캐롤의 강박관념과 환상, 섬망 증세를 보여줍니다. 특히 카트린느 드뇌브의 연기에 크게 기대고 있는데, 그녀는 손톱을 이빨로 계속 물어뜯거나 콧등을 심하게 문지르기도 하고, 일하는 도중에 멍하니 정신을 놓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에게 잠을 잔다는 오해를 사기도 합니다.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는 콜린과 키스를 하고 돌아와서는 이를 심하게 닦고, 자신의 컵 안에 놓여 있는 언니 애인의 칫솔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그녀의 신경증은 토끼 고기를 두고 정점에 달합니다. 그녀는 언니가 요리하려다 말고 냉장고에 넣어 놓은 토끼 고기를 꺼내놓고 잊어버리고, 토끼 머리를 잘라서 핸드백에 넣은 뒤 출근합니다. 토끼 고기 위에 파리가 웅웅거리는데, 껍질을 벗긴 토끼 고기는 얼핏 보면 사람의 모습을 닮아서 더 끔찍합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주인공인 캐롤의 신경증을 워낙 탁월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후반부에 그녀가 저지르는 두 건의 살인은 그게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할지라도 오히려 불필요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사람은 모두 그녀가 닫아놓은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오려던 사람이고(갈라진 벽을 부수고 들어오는 괴한과 마찬가지로), 그런 점에서 그녀에게는 그들이 어떤 이유로 들어왔든 자신을 위협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그 살인이 아니라도 그녀의 파멸을 묘사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던 것 같은데, 감독은 공포영화에 반드시 살인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혐오>는 시각적으로 화려하지는 않아도 풍부한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영화가 시작할 때 카트린느 드뇌브의 눈을 클로즈업하고 그 눈 위로 크레딧이 올라가는 아이디어는 감탄할만해요. 이 영화에서 눈의 이미지, 그리고 아파트의 작은 보안창과 벽의 틈으로 엿보는 행위는 눈의 본래 기능인 타인에 대한 관찰과 소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 주인공인 캐롤의 황폐한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재미있습니다. 로만 폴란스키의 또 다른 영화인 <악마의 씨>를 생각해 보면, 그는 확실히 신경증을 잘 묘사하는 감독입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장면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캐롤과 도저히 연락이 닿지 않자 거의 미칠 지경이 된 콜린이 그녀가 사는 아파트의 문을 부수다시피하고(!) 들어옵니다. 활짝 열린 문을 배경으로 콜린은 그녀에게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든 고백하려고 안절부절하는데, 옆집에 사는 할머니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들 뒤에서 그 장면을 빼꼼히 쳐다보고 있습니다. 살인은 할머니가 떠난 뒤에 이루어집니다. 왜 이 장면이 그렇게 인상깊었는지, 지금도 계속 생각하는 중입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Wolverine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박쥐성의 무도회 (The Fearless Vampire Killers, 1967)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출연 : 로만 폴란스키, 잭 맥고런, 샤론 테이트, 퍼디 메인, 알피 바스


이 영화는 어렸을 때 KBS 토요명화에서 처음 봤습니다. 중간부터 봤지만 이 영화를 오랫동안 잊지 못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몹시 무서웠던 결말 때문이었죠. 이 영화를 기억 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작년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호러 영화 파티 행사를 할 때 다시 봤습니다. 그때 뭔가 끄적여보려다 만 것은 영화 내용에 대한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여자 주인공 두 사람을 착각했습니다. 나중에 흡혈귀가 된 여관 주인 샤갈이 하녀를 집적거린 것인데, 딸을 집적거린 것으로 오해한 것이죠. 제가 생각해도 뭔가 이상했고 쓰지 말아야겠다 싶었습니다. 어제 EBS에서 다시 보았는데 공중파에서 몇 년 만에 방영한 것인지...

아브론시우스 교수는 박쥐 연구자이자 흡혈귀 전문가입니다. 동료 교수들에게는 따돌림을 당하는 것 같은데, 조수인 알프레드를 데리고 트랜실바니아 지역을 여행하고 있습니다. 이 여관 곳곳에는 마늘이 잔뜩 달려 있고, 사람들은 뭔가 숨기고 있습니다. 알프레드는 여관 주인 샤갈의 어여쁜 딸인 사라에게 반하는데, 사라는 여관에 나타난 폰 크롤록 백작에게 잡혀 갑니다.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는 흡혈귀를 퇴치하고 사라를 구출하기 위하여 새벽에 그들의 성을 찾아가는데, 마침 그날 밤은 1년에 한 번 흡혈귀들의 무도회가 열리는 밤이었습니다.

뱀파이어 킬러(?)인 두 사람의 캐릭터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흡혈귀라는 존재에 대해 학문적인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아브론시우스 교수는 <드라큘라>의 반 헬싱에 필적하는 존재지만 그보다 훨씬 경박하고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둔하죠. 흡혈귀들에게 쫓기는 와중에도 왕박쥐를 보고 감탄한다는 게 어쩌면 반 헬싱보다 더 학자다운 면모라고 할 수 있겠지만, 긴장감이 없고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것 등은 뱀파이어 킬러로서는 실격입니다. 탑 꼭대기에서 탈출하는 장면 등을 보면 원래 머리가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그의 제자인 알프레드는 지나치게 마음이 약한 사람이라 역시 실격입니다. 그가 폰 크롤록 백작의 심장에 제대로 말뚝을 박았다면 모든 일이 잘 풀렸을 텐데 말입니다. 알프레드가 사랑하는 사라도 별로 영리하지는 않고, 그저 목욕을 좋아하는 철없는 아가씨로 그려집니다. 마지막에 그녀가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를 따라 나선 것도 햇볕이 잘 비치는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휴양지에 대한 동경이 컸겠죠. 사라는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은데, 샤갈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흡혈귀에 대해서 사라에게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러니 사라가 백작의 하인인 쿠콜의 눈에 띄게 되었죠. 마그다는 재빨리 숨었는데 말입니다.
하여튼 뱀파이어 킬러로서는 실격인 두 사람이 흡혈귀를 잡는다고 나섰으니 당연히 잡히는 흡혈귀가 있을 리 만무합니다.

이 두 사람이 비하면 흡혈귀들은 전형적인 귀족들입니다. 폰 크롤록 백작과 그의 아들인 헤르베르트는 좀 다르지만 나머지 흡혈귀들은 굉장히 무력한 존재로 그려지는데(아브론시우스와 알프레드조차 그들을 제압하고 옷을 뺏어서 갈아입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에 비하면 서민 출신인 흡혈귀 샤갈은 훨씬 활기차고 영리합니다. 샤갈은 폰 크롤록 백작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그의 명령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지도 않고, 굉장히 독립적이에요. 그런 장면도 있는데, 흡혈귀가 된 샤갈이 백작의 성으로 찾아와서 백작이 자는 방에 관을 두고 같이 자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쿠콜이 샤갈을 빛이 잘 드는 마구간으로 내쫓죠. 그런데 나중에 알프레드가 헤르베르트의 관을 열어 보니 샤갈이 그 위에서 자고 있습니다. 샤갈은 흡혈귀가 된 후에도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를 피해 도망치고, 마지막에는 자신을 폰 크롤록으로 가장한 아브론시우스 교수의 협박에 꼴딱 넘어가는 우스꽝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는 전통 민담에 등장할법한 흡혈귀인 것 같습니다.
샤갈과 그에게 죽음을 당한 하녀 마그다, 그리고 새로 흡혈귀가 된 사라와 알프레드는 고성에 틀어박힌 채로 "비쩍 마른 나무꾼 한 명을 두고 절망하는" 사멸해 가는 귀족 출신 흡혈귀들 대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갈 것입니다. 생각해 보니 무섭기도 하고, 또 은근히 활기차고 민주적인 결말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샤갈처럼 사라에게도 십자가가 안 통하겠네요.

이 영화에서 흡혈귀에 대한 이론은 정립되어 가는 상태고, 완벽하게 검증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각 영화에서 흡혈귀에 대한 설정이 서로 어떻게 다른지, 그걸 확인해 보는 것도 흡혈귀 영화를 보는 재미이지요.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는 알리보리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보이는 책을 가지고 있는데, 그 책에 따르면 흡혈귀는 거울에 비치지 않습니다. 알프레드가 헤르베르트를 만났을 때 그가 거울에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이론이 맞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호기심이 지나친 아브론시우스 교수는 자기가 그걸 직접 확인해 봐야 된다고 안타까워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브론시우스 교수는 햇볕이 잘 드는 곳에서 며칠 요양하면 나을 거라고 사라에게 말하는데, 그 이론은 완전히 잘못 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서든 폰 크롤록 백작을 죽여야만 했어요.
재미있는 것은 다른 흡혈귀들에게는 십자가가 통하지만 샤갈에게는 십자가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You got the wrong vampire!) 그건 샤갈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영화에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 영화에는 재미있는 설정들이 많은데, 우선 폰 크롤록 백작의 아들인 헤르베르트는 게이입니다. 상의만 입은 헤르베르트는 알프레드가 가진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100가지 방법이라는 책에 맞춰 그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목을 물려고 하는데, 이 부분이 영화에서 가장 섬뜩하면서도 우스운 대목입니다. 간신히 도망친 알프레드가 어디 쳐다보지도 않고 회랑을 한 바퀴 돌아서 헤르베르트에게 돌아오는 장면도 있고, 헤르베르트가 음산한 음악에 맞춰 맹수처럼 달려드는 장면도 압권입니다.
옛 흡혈귀 전설, 그리고 많은 흡혈귀 영화에 따르면 사람이 흡혈귀가 되면 먼저 생전의 가족을 공격합니다. 여관 주인인 샤갈은 납치된 딸을 찾으러 갔다 흡혈귀가 됩니다. 당연히 돌아와서 아내를 흡혈귀로 만들어야 겠지만, 그는 아내의 눈을 몰래 피해서 하녀를 공격합니다. 죽은 다음에도 아내는 여전히 무섭고, 그래도 하녀랑 바람은 피워야겠고... 원래 샤갈에게 냉정하게 대하던 하녀는 일단 물리고 나자 눈이 맞았다고 해야 되나, 그런 사이가 됩니다.

이런 우스운 설정에 맞춰 여러 가지 재미있는 장면들이 있는데, 샤갈이 흡혈귀로 되살아나는 장면도 우스꽝스럽게 연출이 되어 있으며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가 베게를 가지고 말뚝 박는 연습을 하는 장면도 재미있습니다. 다만 예측을 못했던 것은, 작년에 극장에서 볼 때 아브론시우스 교수와 알프레드가 칼을 빼들어 십자가를 만들어 흡혈귀들을 제압하는데 그 장면에서 사람들이 많이 웃더라고요. 일부러 우스꽝스럽게 연출한 장면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요. 하긴 작가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달리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법입니다. 어쨌든 이 영화의 코믹한 장면들은 은근한 구식 스타일의 추격전과 관련된 설정들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옛날 관객들에게는 당연히 잘 통했겠고, 그걸 식상하다고 여기는 시대에는 또 안 통했겠지만 이런 슬랩스틱이 귀한 지금 같은 시대에는 충분히 잘 통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스운 영화라고 해도 마지막 장면의 공포스러움은 여전합니다. <박쥐성의 무도회>는 코미디와 호러를 거침없이 오가는 로만 폴란스키의 능력이 잘 발휘된 재미있는 영화이며, 또 이 영화를 찍으면서 만난 뒤에 결혼한 샤론 테이트와 로만 폴란스키의 비극적인 뒷이야기로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Posted by Wolverine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악마의 씨 (Rosemary's Baby, 1968)

감독 : 로만 폴란스키
원작 : 아이라 레빈

출연 : 미아 패로우, 존 카사베츠, 루스 고든, 시드니 블랙머, 모리스 에반스, 랄프 벨라미

중학교 땐가, KBS 2 TV에서 박쥐성의 무도회(The Fearless Vampire Killers)라는 굉장히 인상적인 공포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흡혈귀 잡는 박사의 어리버리한 조수로 나온 미남 청년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로만 폴란스키였다는 건 아주 나중에 알았습니다. 교수와 조수는 낮에 잠자고 있는 흡혈귀들에게 말뚝을 박으러 가는데 교수는 흡혈귀들의 은신처를 눈앞에 두고 창문틀에 몸이 끼어 버리고, 마음 약한 조수는 교수가 재촉하는데도 차마 말뚝을 박지 못하고 갈팡질팡 하다가... 그때 여주인공으로 나왔던 배우가 굉장히 우아했다는게 지금도 기억이 나는데 바로 샤론 테이트였습니다. 당시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로 임신 중이었던 샤론 테이트가 악마의 씨를 보고 감동받았다는 찰스 맨슨 패거리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했다는 건 악마의 씨를 못 본 사람들도 알만큼 유명한 얘기고요.
몇 년 전에 동서 출판사에서 로즈메리 베이비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원작을 먼저 읽었는데, 몇 시간 동안 손에서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동서추리문고의 책들을 많이 읽지는 못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가장 재미있는 작품들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경험상 원작을 읽고 영화를 보면 영화가 재미 없고, 영화를 보고 원작을 읽으면 원작이 재미없었는데 이번에는 어떨지 궁금했습니다.

대단하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감독은 단 한 번도 깜짝쇼를 하지 않습니다. 숨어 있다가 튀어나오기, 시끄러운 소리로 놀라게 하는 테크닉은 이 영화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힙니다. 원작을 읽었고, 원작을 읽기 전부터 이 영화의 주요한 설정과 줄거리는 들어서알고 있었지만 그게 영화를 보는 데 큰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원작 소설과 영화가 모두 재미있는, 저로서는 굉장히 드문 경우였던 것 같습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로즈마리 우드하우스라는 여성이 배우인 남편 가이를 따라 뉴욕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옵니다. 그 아파트는 마술사라고 자칭하던 사람이 살았던 적이 있으며 거기 살고 있던 마녀들이 아이를 잡아먹었다는 끔찍한 전설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로즈마리는 아파트를 좋아했고, 이웃들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하지만 로즈마리에게 친절히 잘 해줍니다. 어느 날 로즈마리는 기괴한 꿈을 꾸고 임신을 하게 되는데, 악마 신봉자들이 자기 아이를 제물로 바칠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 기억으론 아이라 레빈의 원작에서 로즈마리는 자신의 아이가 악마의 씨앗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악마의 씨에서 미아 패로우가 연기한 로즈마리는 좀 다르게 생각합니다. 악마 추종자들이 자신의 아이를 빼앗아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거죠.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중반에 영화를 일부러 모호하게 만듭니다. 닥터 힐에게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털어 놓는 로즈마리는 조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책 한 두 권을 읽고 거기 나온 것이 모두 진실이라고 믿어 버리는 로즈마리의 행동은 지나친 것입니다. 닥터 힐은 가이와 새퍼스타인에게 연락을 해버리고 말지만 실제로 그게 그 사람이 취할 수 있는 당연한 행동으로 보일 정도입니다. 미아 패로우가 출산을 한 뒤의 몇 장면에서는, 물론 가이가 굉장히 뻔뻔스러운 인물이라서 그렇게까지 보이진 않지만 로즈마리가 생각한 것이 가이의 말대로 임신에 따른 우울증과 고통 때문에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는 분위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로즈마리는 악마 숭배자의 표식이 어깨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가이에게 어깨를 보여달라고 하지만 어깨에는 아무 것도 없고...

그러나 악마의 씨는 오컬트 스릴러이며 임산부의 고통과 악몽, 환상을 다루다 영화를 끝내지는 않습니다. 정신나간 악마 숭배자들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는 앞서 말한 대로 깜짝쇼가 절대 펼쳐지지 않습니다. 끔찍한 살인 장면도, 신경을 긁는 효과음도 없습니다. 로즈마리를 조여오는 공포도 그 자체로 무서운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무서운 일들은 결코 요란하게 벌어지지 않습니다. 로즈마리의 이웃들이 임신한 로즈마리와 함께 파티를 벌이는 장면에서 로만이 외치는 1966년이 서역 1년이라는 이상한 구호(그 구호의 의미가 밝혀졌을 때 주는 섬뜩한 느낌이란...), 막혀 있던 문의 정체, 로즈마리가 문을 잠그고 숨어 있는데 어느새 들어온 이웃들이 로즈마리의 등 뒤로 지나가는 장면 등등은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히 뒷덜미를 잡아 챕니다.

냉전 시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는 두 가지 공포가 있는 것 같은데, 하나는 실재하는 악마주의자들의 공포이고(그것도 선량하고 친절한 이웃들) 다른 하나는 All of them witches를 외치는 내면의 광기와 신경증이 빚어내는 공포... 무리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영화를 공산주의자들을 조심하라고 외치는 영화로 보기 싫어서 덧붙이는 해석인지도 모르죠.

영화 초반에 로즈마리와 함께 세탁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곧 떨어져 죽게 되는 지오노프리오라는 이탈리아계 여성이 있습니다. 책에서는 나중에 그녀의 죽음에 대한 설명을 하는데, 원래 악마 숭배자들이 사탄의 아이를 밸 몸으로 점찍어뒀는데 사탄을 보고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죽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영화에서는 그녀가 죽은 원인에 대해 (나중에 관객들도 그 원인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겠지만) 설명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을 카스타벳 부부가 로즈마리 부부에게 접근할 계기로 만드는 걸 보면, 원작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을 추려낸 것 같습니다. 군더더기가 없고 짜임새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에서 악마 숭배자들의 사타니즘은 기독교의 패러디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어디서 사타니즘이 원래 그런 것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잘 기억은 안 나지만... 하여튼 로즈마리의 임신, 서기 1년, 아기의 요람에 거꾸로 걸린 십자가 등등은 뒤집으면 다 기독교의 전설이자 역사, 상징입니다. 재미있군요.

- 2006. 7. 4

Posted by Wolver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