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 뉴욕 (King of New York, 1990)
감독 : 아벨 페라라
출연 : 크리스토퍼 워큰, 데이비드 카루소, 로렌스 피시번, 웨슬리 스나입스, 자넷 줄리언, 스티브 부세미
지난 일요일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있었던 <킹 뉴욕>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 시간에는 류승완 감독이 참석했습니다. 영화를 찍는 도중에 시간을 쪼개서 온 것 같습니다(그러나 그 와중에도 볼 영화는 다 보셨다는). 원래는 서울아트시네마측에서 지난 '아메리칸 뉴 시네마 특별전' 이후 80년대, 90년대 미국 영화들을 다룬 특별전을 기획하고 있었고, 그때 아벨 페라라의 <킹 뉴욕>을 상영하려고 했었답니다. 처음에 류승완 감독이 이 영화를 추천했고 그래서 류승완 감독의 GV가 예정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영 관련 문제로 아벨 페라라에게 허락을 받을 일이 있어서 연락을 했는데, 정말 간단하게 "좋다. 그런데 내가 아시아에 가본 적이 없다. 이번에 갔으면 좋겠다." 그런 대답이 왔다고 합니다. 예정에 없던 일이라서 그랬는지 아트시네마 측에서 연락을 빨리 하지 않았는데 아벨 페라라 감독이 "내가 가고 싶다고 했는데 왜 연락이 없느냐"며 강하게 어필을 했고, 그제서야 아벨 페라라의 내한 및 다른 영화들의 상영 준비가 급히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번에 아벨 페라라 감독이 오지 못하게 되어서 류승완 감독이 다시 왔으니 원래대로 돌아온 셈입니다. 필름으로 <킹 뉴욕>을 보는 것은 류승완 감독이나 김성욱 프로그래머나 처음이었던 모양이고, 두 사람 모두 영화를 본 후에 멍해져서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류승완 감독은 탄식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뉴욕 할렘 지역의 흑인 갱단 두목 프랭크 루카스(크리스토퍼 워큰)가 출소하는 장면입니다. 푸른 죄수복을 입은 프랭크 루카스가 양복으로 갈아입고 감옥을 나서면 검은 리무진 한 대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리무진이 감옥을 나서면 거대한 감옥 철문이 천천히 닫히는데, 이 장면은 마치 그가 해방된 것이 아니라 다시 감옥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즉, 프랭크 루카스는 출소했지만 세상은 그에게 또 다른 감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는데, 출소하는 금자가 "너나 잘 하세요"라는 멘트를 날린 뒤 걸어가는 장면을 가만히 보면 그녀의 모습은 창살 그림자에 덮여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언젠가 그 장면을 통해 금자가 감옥 바깥에서도 갇혀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 것 같은데, 지금에서야 박찬욱 감독에게서 페라라의 영향을 느낍니다. 두 감독의 세계관이나 인물을 바라보는 태도, 영화의 주제의식 등의 유사성이 이 장면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후에 전개되는 이야기를 보면 프랭크와 그의 부하들은 에밀리오 자파, 아티 클레이, 래리 왕, 킹 티토 등의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뉴욕의 마약 조직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프랭크는 마약을 팔아 돈을 벌지만 명망이 높고 그 지역의 의원(상원인지 하원인지) 및 유명인사들과도 교류가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었던 그는 할렘의 빈민가에 종합병원을 세우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차츰 실현시켜 나가지만, 데니스 길리를 중심으로 한 젊고 거친 형사들은 '뉴욕의 왕'이 된 프랭크 화이트를 제거하기 위해 작전을 세웁니다. 영화는 프랭크의 꿈이 형사들과의 충돌로 산산조각나는 과정을 잘 그려가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 영화의 형사들과 범죄자들은 전부 아는 사이입니다. 형사반장인 로이 비숍과 젊은 형사인 길리, 토머스 등이 프랭크 화이트를 연행하는 장면을 보면 로이 비숍은 프랭크 화이트의 옛친구(물론 비꼬는 의미겠지만)였으며 길리도 프랭크가 감옥에 가기 전에 그를 겪어보았다는 것 등을 알 수 있습니다. 프랭크의 오른팔인 지미 점프와 토머스가 대면하는 장면에서도 마찬가지고요. 형사와 범죄자들이 서로 알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길리 및 다른 형사들의 프랭크 화이트에 대한 강렬한 증오심은 범죄와 범죄자에 대한 일반적인 분노를 가볍게 뛰어 넘을 정도이며 그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뭔가가 쌓여 왔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들의 갈등의 한 축을 이루는 것 중 하나가 인종/민족 문제라는 것입니다. 같은 흑인인 지미와 토머스는, 이쪽은 저쪽을 같은 흑인 형제 사이의 의리를 저버린 자로 보고, 반대로 저쪽에서는 이쪽을 흑인의 수치로 보며 결국 두 사람이 서로 멱살을 잡은 채로 이쪽이 저쪽을 죽이고 마는 처절한 순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류승완 감독이 지적했듯 인종/민족 문제는 이 영화에서 여러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 내고 있는데, 백인인 프랭크 화이트가 흑인 갱단의 보스를 맡고 있다는 것에서부터, 토머스의 아내가 백인이라는 설정, 흑인인 토머스와 아일랜드계인 길리의 유대의식과 이질감, 푸에르토리코, 아프로 아메리칸, 중국인, 아일랜드 인 등등으로 다양하게 분화된 갱들이 서로에 대해 느끼는 인종적인 감정까지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나지만(아일랜드계 갱인 아티 클레이는 프랭크 화이트에게 나는 검둥이랑 노는 놈은 상대 안 한다고 내뱉습니다) 그게 영화 전면의 주제의식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아메리칸 갱스터>가 획득하고 있는 미국 사회의 인종문제에 대한 인식이, <킹 뉴욕>에서는 좀 더 은밀히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킹 뉴욕>에는 <아메리칸 갱스터>에 없는 게 하나 더 있습니다. 현상금이 붙은 뒤에 비숍의 집을 찾아간 프랭크 화이트는 비숍을 살해할 것을 청부했다는 말을 하고, 거기서 나오기 전에 "이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때 프랭크 화이트는 world가 아니라 circle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자막에서 세계로 번역된 말은 바로 circle입니다. 장 피에르 멜빌의 <암흑가의 세 사람 Le Cercle Rouge>을 연상시키는 이 단어는 프랭크 화이트뿐만 아니라 비숍 반장 역시 서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운명과 숙명의 굴레에 들어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 역시 지미와 토머스가 그랬던 것처럼 한쪽이 다른 쪽을 죽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범죄자든 형사든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이 허무주의적/운명론적 세계관은 <아메리칸 갱스터>가 갖고 있지 못한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장 피에르 멜빌의 영화들을 비롯한 갱스터 영화들과 <킹 뉴욕>을 이어주는 것입니다. <킹 뉴욕>에서는 인종/민족문제라는 사회적 층위와 인간의 숙명이라는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층위가 맞물리면서 폭발하고, 그 속에 말려든 인간은 비극적인 운명을 겪습니다.
그러나 <킹 뉴욕>은 갱스터 영화의 허무주의를 드러내면서도 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악질경찰>에서 보여주는 페라라 영화 특유의 주제의식을 파고듭니다. 갱들과 형사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서로 싸우고 죽여가고 그 틈에서 선과 악의 경계는 불투명해집니다. 형사들은 법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며 그 와중에 잔인하고 악랄해집니다. 반면 범죄자는? 프랭크 화이트의 목표는 빈민가에 종합병원을 건립하는 것이며, 역설적으로 프랭크 화이트가 처단한 갱 두목들은 아동에게 매춘을 강요하거나 난민들을 착취한, 더욱 질이 나쁜 범죄자들입니다. 이렇게 모호한 선과 악의 경계 속에서 프랭크 화이트는 구원을 받고 싶어하지만 그의 방식은 필연적으로 누가 너에게 그럴 권리를 주었느냐는 반문에 부딪쳐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을 강간한 자들을 용서하려던 수녀에게 <악질경찰>의 하비 케이틀이 던진 질문이기도 합니다. 거침없이 살인을 저지르는 갱단 두목 프랭크 화이트는 다른 이들에게 선을 베풀어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만 그는 과연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가 도우려고 했던 사람들은 그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은 프랭크 화이트뿐만 아니라 형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던져지며, 이 영화는 그런 주제의식을 가짐으로써 상업 영화이면서도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영화임을 보여줍니다. 이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특히 프랭크 화이트가 지하철을 벗어나 위로 걸어 올라가는 장면의 롱테이크는 말할 수 없이 경건해 보입니다. <악질경찰>에서는 이런 주제의식이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그러면서 조금은 덜 재미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크리스토퍼 워큰입니다. 크리스토퍼 워큰이 연기한 프랭크 화이트는 자신의 숙명을 인식하고 있기에 피로하고 고독해 보입니다. 그는 출소했을 때부터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시간이 더 주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1년만 더 주어진다면 좋은 일을 할 텐데. 1년만 더 있으면 할 수 있을 텐데. 출소하는 길, 리무진 안에 타고 있는 프랭크 화이트의 창백한 얼굴은 피로와 고독을 담고 있으며 창백한 푸른 톤의 화면은 그를 마치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합니다. 류승완 감독은 <킹 뉴욕>이 <악질경찰>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데(킹 뉴욕은 클로즈업과 망원렌즈를 많이 사용했으며 악질경찰은 인물들의 즉흥연기를 많이 허용하고 광각렌즈를 주로 썼다고 합니다) 이런 인물의 면모가 크리스토퍼 워큰의 연기를 통해 생생히 살아나며 그에게 동화되도록 합니다. 그는 고독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정말 무서운 갱 두목이기도 합니다.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거침없이 살인을 저지르며, 웃다가도 다른 사람들을 꽁꽁 얼릴 수 있고, 반대로 얼어 있는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 그의 카리스마는 보는 사람들을 긴장하게 합니다. 류승완 감독은 크리스토퍼 워큰이 형사로 나오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 그가 상대를 바라보며 왜 그랬는지 이유만 얘기해달라고 답하면 얘기하지 않고 배길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래서 형사 역을 맡을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얘기예요. 류승완 감독이 드래곤볼 머리라고 부르는 헤어스타일 및 모든 스타일이 그의 카리스마를 뒷받침합니다.
배우들이 정말 재미있는 영화인데, 프랭크 화이트의 부하로 나와서 잠깐 뒤에 사라지는 스티브 부세미도 그렇거니와, <매트릭스>만 본 관객들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로렌스 피쉬번(크레딧에는 래리 피쉬번으로 올라갑니다)의 양아치 연기도 좋았습니다. 웨슬리 스나입스는 거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순한 경찰이고 <CSI 마이애미>에서 호레이스 반장 역을 맡은 데이비드 카루소가 데니스 길리 역을 맡았는데 그는 이번에도 악을 미워하는 경찰로 나옵니다. <CSI 마이애미>보다 더 심하게 미워하죠. "프랭크 화이트가 밖에서 사람을 죽일 때마다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가 사람을 한 명 죽일 때마다 그건 우리 책임이다." 라는 대사도 좋습니다. 그 대사가 없었으면 길리라는 인물에 동감하기가 그만큼 힘들어졌을 것 같습니다.
추신
<킹 뉴욕>의 중국계 갱인 래리 왕은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퓨너럴>에서도 오프닝이 험프리 보가트의 영화로 시작하는데, 이런 장면들을 통해 감독은 자기가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갱이 보는 영화가 <노스페라투>입니다. F.W. 무르나우의 아주 오래된 흡혈귀 영화를 보는 갱이라니 어울립니까? 더군다나 그의 대사 중 하나는 "이 다음 영화는 <프랑켄슈타인>인데 그냥 갈 거야?" 말하자면 그는 고전 공포영화의 팬인 셈입니다(가만히 보면 마지막에 새벽닭이 우는 장면이 앞에 나오고, 그 다음에 노스페라투가 배에서 선장을 공격하는 장면이 뒤에 나옵니다. 영화를 찍다 보니 그렇게 된 건지 몰라도 영화의 앞장면과 뒷장면이 바뀌어 있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생각나는 건 임권택 감독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였는데 거기서는 박노식이 연기한 조폭이 반짝이 옷을 입고 피아노를 아주 멋지게 연주합니다. 언젠가 키노 잡지에서 이 장면을 가리켜 B무비의 정서가 살아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흔히 우리나라의 B무비 영화광 출신 영화감독들이 말하는 B무비의 불균질함, 즉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을 저는 <킹 뉴욕>의 극장 장면에서 찾은 것 같습니다. 물론 <킹 뉴욕> 자체는 그때까지 아벨 페라라 영화 중에서 가장 많은 제작비를 들인 영화로 B무비가 아닙니다.
프랭크 화이트가 병원 병실에서 래리 왕과 함께 마약 거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은 위험하고 아찔해 보입니다. 류승완 감독 말마따나 그는 살짝 미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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