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할 자 (The Unforgiven, 1960)
감독 : 존 휴스턴
출연 : 버트 랭카스터, 오드리 헵번, 릴리언 기쉬
<용서받지 못할 자>는 맹목적인 등장인물들이 일직선으로 달려가는 뜨끈뜨끈하고 잔인한 영화다. 줄거리 설명부터. 허리에 칼을 찬 이상한 노인이 그들 주변을 돌아다니면서부터 외딴 서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는 재커리 가족에게 재앙이 닥친다. 과거에 아들을 잃어버린 일로 재커리 집안에 원한을 품은 켈시 노인은 재커리 가족의 수양딸인 레이첼이 인디언인 카이오와 부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고(아버지 재커리가 인디언 학살 도중에 갓난아기인 그녀를 발견하여 데리고 왔다), 재커리 가족은 마을 백인들로부터 버림받는다. 강인하고 근면한 첫째 아들 벤과 레이첼은 마음 속으로 서로 좋아하지만 벤은 그 감정을 애써 누르고 있었는데, 켈시를 통해 레이첼의 소재를 알게 된 카이오와 인디언들이 찾아와 자기 부족 출신인 그녀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면서 재커리 가족은 인디언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게 된다.
<용서받지 못할 자>는 다른 문화에 대해 관대하고 타자를 넉넉히 지켜볼 줄 아는 주인공들이 나오던 존 휴스턴의 몇몇 영화와는 정말 다르다. 이 영화에서 인디언들의 습속은 우스꽝스럽게 묘사된다. 백인들의 카이오와 인디언에 대한 적개심은 너무 크고, 그것은 재커리 가족도 마찬가지. 영화를 통해 보이는 여러 가지 정황상 인디언과 백인 사이에 평화로운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몇몇 인물들은 인디언들과 싸우겠다는 자들을 말리기도 하지만 그것도 사실은 전략적인 판단일 뿐. <용서받지 못할 자>의 서부는 겉으론 카우보이가 소를 몰고 다니는 목가적인 곳이지만 속으론 백인들과 인디언들 사이의 깊은 증오가 반드시 피를 보고야 마는, 그런 지옥이나 다름 없다. 이 영화의 결말은 사실은 너무나 참혹한데도 해피 엔딩으로 위장되어 있다. 피를 나눈 형제를 죽임으로써, 혹은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봄으로써 이제껏 자신이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집단 안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것. There will be blood. 재미있지만, 보고 나서 지쳐버렸다.
'오드리 헵번'에 해당되는 글 2건
- 2008/04/04 용서받지 못할 자 (2)
- 2007/02/05 하오의 연정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2)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 1957)
감독 : 빌리 와일더
출연 : 오드리 헵번, 게리 쿠퍼, 모리스 슈발리에
파리의 사립탐정인 클로드 샤바스는 여러 기업을 소유한 거부이자 세계적인 바람둥이인 미국인 프랭크 플래너건의 뒤를 캐서 고객의 아내와 밀회를 나누는 현장을 포착합니다. 고객은 플래너건을 죽이려고 호텔로 가는데 클로드 샤바스의 호기심 많은 딸 아리안은 몰래 그 말을 듣고 플래너건을 살리기로 마음 먹습니다. 아리안은 플래너건을 만나 그를 좋아하게 되지만 플래너건은 사랑 따위는 믿지 않고, 여자가 집착하는 것을 싫어하며 더구나 자기가 첫사랑이라는 여자는 질색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리안은 자신도 남자 경험이 많은 바람둥이인 것처럼 그를 속입니다.
영화의 제목이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인 것은 아리안이 오후 4 - 5시 경 그를 만나 데이트를 하고 밤 늦기 전에 돌아가기 때문인데, 그녀 자신이 스스로를 하오의 여인(Girl in the afternoon)이라고 칭하기도 합니다. 바람둥이 백만장자는 가난뱅이 음악학교 학생이 사랑하기엔 너무 버거운 상대죠. 신데렐라가 구사했던 철저한 신비주의 전략에 더한 거짓말이 아리안의 연애 전략입니다. 아리안은 플래너건에게 자기 이름조차 알려주지 않고, 아버지의 파일에서 본 온갖 사건들을 짜집기해서 자기 연애담을 만듭니다. 알프스에서 만난 알파인 선수 무릎이 너무 귀엽게 생겼더라, 무릎에 보조개도 있더라, 스페인에서 투우사를 만났고 브뤼셀에서 은행가를 만났다, 기타 등등.
나중에 모든 것을 알게 된 클로드 샤바스는 아리안이 플래너건을 속인 것에 대해 "당신과 같은 세계에 속하고 싶었던 것 같다." 라고 말하지만 그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아리안은 플래너건이 자기 때문에 자살하려 했던 여인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도 없고, 오히려 정말 귀찮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를 사랑하면서 상처입지 않기 위해, 동시에 그가 자신을 부담스럽게 여겨 도망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데 방향이 미묘하게 바뀌는 것은 아리안이 자신의 가짜 연애담을 플래너건의 질투를 불러 일으키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플래너건은 바람둥이답지 않게 진심으로 아리안의 옛 남자들을 질투해서 녹음된 그 남자들의 이름을 밤새도록 들으며 술에 취하기도 합니다. 누구 말인지 모르겠는데 연애에서는 덜 집착하는 쪽이 권력을 잡게 된다죠. 이렇게 보니 <하오의 연정>은 마치 연애를 둘러싼 게임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영화인 것 같군요.
<하오의 연정>은 파리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나 나이나 신분을 가릴 것 없이 사랑을 많이 하는 낭만적인 사람들임을 보여주면서 시작하고 아리안과 플래너건의 연애도 낭만적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는 뭔가 절박한 것이 보입니다. 플래너건이 기차를 타고 떠날 때 아리안은 기차를 따라가며 끝까지 거짓말을 하죠. 리비에라로 여행을 간다, 남자들이 많아서 외롭지 않을 거다... 물론 아리안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온몸으로 그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플래너건도 진실을 알고 있기에 마무리는 해피 엔딩이지만, 아리안이 아무리 예뻐도 플래너건이 언젠가는 싫증을 내게 되겠죠. 첫사랑이라서 힘들겠지만 아리안은 의외로 독하기 때문에 잘 살아 갈 겁니다.
젊은 시절 오드리 헵번이 나온 영화가 모두 그렇겠지만, <하오의 연정>을 얘기하면서 오드리 헵번의 미모를 이야기 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도 큰 실수 같습니다. 하얀 옷을 입어도 예쁘고, 검은 옷을 입어도 예쁘고, 가녀리고 우아하며 기품이 있습니다. 스크린으로 봐서 특히 좋았고요. 전형적인 미인이라는 느낌은 안 들어요. 목이 긴 게 모딜리아니가 굉장히 좋아했겠어요. 게리 쿠퍼는 이때 나이가 좀 들어서 오드리 헵번이 한 눈에 보고 반할 만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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