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
프랭크 밀러(글, 그림), 린 발리(채색) 지음
김지선 옮김
세미콜론, 2007
영화 <300>의 원작인 프랭크 밀러의 만화 <300>을 봤습니다. 판형이 크지만 100페이지도 안 될 정도로 분량이 적은데, 가격도 15,000원으로 만만하지는 않고요. 그래도 볼만합니다. 만화 <씬 시티> 같이 흑백의 대비를 특징으로 하지는 않지만 그림은 인상적이고, 영화의 몇몇 장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영화에서 레오니다스 왕이 최후를 맞이하기 전 창과 방패를 내려놓고 페르시아 사신에게 무릎을 꿇는 걸 보면서 방심하게 하려는 것이겠지만 굳이 저럴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만화에서는 이렇게 나옵니다. "투구는 숨막히게 답답했다. 시야를 가렸다. 그는 멀리 보아야 한다. 방패는 무거웠다.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그의 과녁은 멀리 있다." 목숨을 돌보지 않고 크세르크세스 왕을 살해하려는데 자신을 지키는 도구인 투구와 방패는 오히려 방해가 되었다는 것이군요.
또 만화는 스파르타 동맹군의 규모를 설명하고 있는데 닥소스가 이끄는 아르카디아 군을 포함하여 테게아, 만티네아, 테스피아이, 테베, 오푸스, 포키스, 말리스 등등 스파르타 군을 빼고 7천 명의 병사가 모였다고 합니다. 에피알테스가 크세르크세스에게 염소의 길을 알려줬을 때 이곳을 지키던 이들은 포키스 인들이었는데 이들은 이모탈이 나타났을 때 도망가지만 테스피아이 인들은 레오니다스의 부하들처럼 싸우다 전사합니다.
프랭크 밀러가 원작을 바꾸는 걸 싫어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1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만화를 영화화하려면 어느 정도 윤색하는 것이 불가피하겠죠. 거기에도 프랭크 밀러의 의견이 반영되었을텐데,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를 위해 새로 지어낸, 만화에 없는 이야기가 있고, 반대로 만화에만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레오니다스의 왕비는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를 떠나는 대목에서만 나옵니다. 그러니 페르시아와 내통하는 의회 지도자 테론, 그와 왕비의 대결 등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스파르타 군인이, 자신을 전쟁터에서 영광스럽게 죽게 할 상대를 찾고 있다고 말하는 부분, 스파르타의 두 병사가 전공을 놓고 경쟁하는 부분, 테르모필라이 협곡의 전투 중에서 페르시아 기마병과 스파르타 중장보병이 대결하는 장면, 페르시아가 화약 무기(마법이라고 했지만 분명히 화약 무기)를 사용하는 장면 등도 역시 영화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이모탈이 민간인들을 학살해서 나무에 꿰어 놓는, 마치 <베르세르크>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도 그렇고요.
실루엣으로 등장한 레오니다스 왕의 오른쪽에 있는 여자가 왕비. 영화랑은 차이가... 많이 납니다.
영화에 빠진 장면은 뭐가 있을까요? 스텔리오스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스텔리오스가 페르시아 사신의 팔을 벤 뒤 화살이 하늘을 가리면 어둠 속에서 싸우겠다고 말하는 부분은 살아 있지만 행군 중에 쓰러진 뒤 구타를 당하는 장면, 왕이 이름을 불러주었다고 기뻐하는 장면 등은 빠져 있습니다. <300> 만화에서 스텔리오스는 레오니다스 왕에 이은 또 다른 주인공이나 마찬가지인데요. 스텔리오스 이야기 말고, 스파르타 인들이 쉬는 시간에 단련을 하는 장면도 영화에 빠졌는데, 그 단련이란 게 사람 한 명을 등 위에 올려놓고 한 팔로 팔굽혀펴기를 하는 겁니다. 병사가 방패와 창을 들고 다른 병사의 등을 밟고 선 상태에서 "지쳤나, 스파르타인?" "아닙니다." "마음에 드나, 스파르타인?" "너무 좋습니다." 따위의 대화를 나눕니다. 야한 뉘앙스가 있죠.
행군 사흘째. 목이 타들어가는 무자비한 열기 속에서 젊은 스텔리오스가 비틀거린다. 용납할 수 없는 일. "스텔리오스 이 얼간이 놈."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지휘관의 구타가 계속되는데 왕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요?
<씬 시티>처럼 꽉 짜이고 강렬한 것은 아니지만 영화 <300>을 좋아한다면 이 만화는 충분히 소장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신체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살아있고, 판형이 큰 게 만화책이라기보단 화보집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제가 보기엔 영화보다 만화의 신탁(oracle, 신탁녀)이 더 예뻐요.
그러고 보니 스파르타의 300인 가운데 이야기꾼인 딜리오스만 살아남는 것은 우연이 아니군요. 훗날 이야기가 전해진 것만으로도 레오니다스는 승리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 행군 도중에 쓰러졌다고 '쓰러질리오스'라는 모욕적인 이름을 얻은 스텔리오스에게는 마지막 순간에 왕에게 이름으로 불린 것이 귀중한 승리였고요.
책에 Thank to가 실려 있는데 그 마지막에 스텔리오스 자카리우(Stelios Zachariou)라는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스텔리오스는 이 사람 이름을 딴 것 같은데 구글에서 찾아보면 그리스 아테네 대학의 역사학자이자 고고학자인 스텔리오스 자카리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이 맞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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