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혼녀(A Woman with Half Soul, 1973)
감독 : 신상옥
출연 : 리칭, 이승용, 김무영, 주영, 김기주
한도령은 돈천냥을 가지고 연화의 집으로 가야했으나 그만 산적에게 빼앗겨 옛 하인인 장쇠네 집에서 지내게 된다. 자신의 배필인 한도령을 못보고 죽은 연화의 혼령이 한도령에게 매일밤 나타나 이승에서 못다한 정을 나눈다. 장쇠는 상전이 귀신과 놀아나는 것을 보고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부적을 붙이지만 효험이 없다. 결국 한도령 스스로가 정신을 차려 연화의 혼령을 멀리하지만... (후략)
줄거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는 한국영상자료원 리뷰를 아무리 살펴봐도, 공포를 집어넣을 구석이 없어 보입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안무서울 것 같지만, 감독이 신상옥인데다 리칭이 출연한다고 하니, 봐도 아쉬울 건 없어 보였습니다.
생각대로 영화는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만, 딱 한 장면 만큼은 괜찮습니다. 연화가 죽음으로써 송진사 집안에는 후사가 끊기고, 송진사가 남긴 유언대로 집안의 모든 재산은 한도령에게 돌아갑니다. 한도령이 나타나지 않자, 자신이 한도령이라고 주장하는 가짜가 무려 8명이나 나타납니다. 그들 가운데 마지막 나타난 사람은 악역 단골로 얼굴이 꽤 익은 배우인데, 여하튼 이 사람이 뭔가 해 주겠거니 하는 기대를 품게 합니다. 연화의 유모는 연화의 혼령이 진짜를 가려줄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칭 한도령들에게 연화의 시신을 둔 방에서 밤을 지새게 합니다. 7명은 차례로 다 나가 떨어지고, 마지막 8번째 남자는 시신 앞에서 놀랍게도 옷을 벗고 입을 맞추며 시간을 기도합니다. 헐, 네크로맨틱? 제가 이 무렵 한국 영화를 자주 본 건 아니지만 꽤 대담한 발상 같은데요.
영화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시대 배경을 알 수 없는 <반혼녀>는 귀신과 이야기라는 익숙한 괴담을 무국적 배경에 버무려넣은 영화입니다. 중국풍 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오가는 와중에 '장쇠'라는 토속적 이름을 지닌 조연이 등장하니 말이죠. 그러나 귀신과 인간의 연애담이라고는 해도, 비슷한 주제를 가진 <천녀유혼>에 비하여 <반혼녀>의 영화적 재미는 상당히 떨어지는 편입니다. <천녀유혼>에서 섭소천과 영채신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은 상당히 강력한 것이었죠. 기본적으로 둘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은 물론 강력한 나무요괴와 천년묵은 흑산대왕, (나중에 둘을 이어주긴 하지만)귀신잡는 도사 연적하 등이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반면 <반혼녀>에서 연화는 소원을 이루고 승천하기 위해 한도령과 첫날밤을 보내려 하는데, 연화를 방해하는 것은 고작 장쇠와 마을의 도사 정도입니다. 장쇠는 성가시긴 하지만 유모 귀신이 가뿐히 가로막을 수 있고, 도사도 처음엔 꽤 비범해 보입니다만 결국 하는 일이 없습니다.
해서, 한도령이 연화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기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이건 공포스러울 것도 없고, 어려울 것도 없는지라, 영화는 사실 아무 긴장감을 품지 못합니다. 그래도 호러 흉내는 내고 싶었는지 영화 중반부에 연화가 장쇠네 술집 손님들을 놀라게 하는 장면을 삽입하긴 했지만 이 장면을 왜 찍었는지는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무섭지도 않거니와 유기적으로 영화와 연결되지도 않아요.
<전설의 고향>의 한 에피소드로 만들었어도 좋을 이 느슨한 영화의 틈을 메우는 것은 그저 리칭의 우아함 뿐입니다. 아무리 재미없는 영화라 할지라도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만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경배.
아.. 그런데 한도령은 정말이지 짜증나는 인물이더군요. 한도령은 천냥을 잃어버렸다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천냥을 갚기 전까진 죽어도 면목 없어서 못가겠다고, 장쇠가 아무리 부탁해도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립니다. 연화네 집에 자신을 사칭하는 가짜들이 득시글 거리고 돈을 노리는 인척(이 부분은 잘 써먹었으면 흥미로웠을 텐데 전혀 건드리지 않았어요)이 깽판을 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의 유언을 내세우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팽개치는 거죠. 나중에 한도령이 귀신에 홀린 것을 안 장쇠가 집에서 나가면 안된다고 붙잡을 때는 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양반댁 도령은 정말이지 다루기 어려워요.
- 2004.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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